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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Bensaïd, <혁명들: 위대하고 정지해있고 침묵하는> 요약-번역

<혁명들: 위대하고 정지해있고 침묵하는> 요약-번역

다니엘 벵사이드

Daniel Bensaïd, "Revolutions: Great and Still and Silent,"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새로운 의미론에 각인되었다. 즉 이제 과거가 미래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밝히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이래로 혁명은 해방의 기대와 희망에 부여된 이름이 되었다. ‘역사의 기관차’로까지 끌어올려진 혁명은 자신의 기계적 꿈이 탈선으로 전복될 때까지 미래를 향해 돌진한다.

혁명이 이 같은 물신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한, 혁명은 성스러운 것에 한쪽 발을 담그고서, 사건을 기적의 갈망으로 가득 채운다. 욕망의 초월성으로부터 필요(need)의 내재성으로 하강하기 위해서는 길고 더딘 세속화 과정이 필요했다. 경험과 시련을 거치면서 혁명은 聖에서 俗으로 이행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19세기 혁명의 비밀이다’라고 썼다. 이 비밀의 폭로는 세계를 두 편으로 가르고, 인민을 인민 자신에 맞서 나눈다. 즉 계급투쟁이 단일한 혁명과 공화국의 신화를 해체하게 된다. 이제 혁명과 공화국 사이에는 불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 비밀의 폭로는 혁명 속의 혁명을 초래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1848년 2월은 프랑스에 공화국을 허락했지만, 6월은 혁명을 공화국에 던졌다. 1848년 2월까지만 해도 혁명은 정부체제의 전복을 의미했지만, 6월부터는 부르주아 사회의 전복을 뜻하게 됐다.’ 이와 같은 혁명적 내용물의 사회적 결정에다, 파리코뮌과 1917년 10월 혁명의 경험은 대중파업과 무장봉기라는 권력투쟁의 전략적 결정을 더했다.

반대로 오늘날 이 심원한 세속화의 운동은 쇠진하고 고갈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혁명적 시대들의 신화적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것의 경험과 내용을 유기한 것처럼 보인다. 혁명은 실제 날짜와 장소의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이제 그 시공간적 구체성은, 우리가 쇄신하지 않고 그저 기념하기만 하는 동안, 관리되는 영원한 현재로 수축되었다.

지난 세기의 모진 패배가 만들어 낸 사회적 상상의 빈혈증 속에서, 혁명적 관념은 정치적 실체를 상실하고 미적ㆍ윤리적 욕망의 위치로, 취향판단이나 신념에 따른 행동 정도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인다. 혁명적 관념은 (1)기원적 혁명의 원천으로 향하는 성지순례와 (2)매끈한 외양으로써 反혁명적 본성을 은폐할 보수적 혁명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우울한 再매혹은 再현혹이며, 여기에 맞서는 새로운 역사화의 노력과 정치화의 격발이 시급하다.

세속적 혁명은 욕망의 강박적 동학으로부터가 아니라 필요의 변증법으로부터 샘솟아 나온다. 세속적 혁명은 변덕스런 욕망의 노예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를 변혁할 이성적 요청에 복종한다. 필요는 減할 수 없는 공백을 메우려는 서글픈 열정이 아니다. 그것은 영구혁명의 기쁜 열정이다. 이 後者 속에서 (1)지속(duration), 즉 역사적 조건과 (2)사건(event), 즉 가능성의 영역에 전환을 가져오려는 불확실한 정치적 행동이 공존하게 된다.

< III >

혁명이라는 용어의 신화적 함의를 해체해야 한다. 혁명은 칸트의 용어를 빌자면 ‘정치적 예언’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의지를 규합하고 기대의 지평을 구성하는 변혁의 공식이다. 이런 관념은, 그것이 가능한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한, 일상적 체념과 전술적 적응과 철새정치화에 맞서는 것으로서 언제나 필요하다.

혁명은 또 한편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근대적 시간성의 정교화에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가속, 개선, 진보의 감수성과 결합했다. 결과적으로 혁명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의 ‘신화적’ 기능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권력분산의 시대를 맞이해 예전의 무장봉기, 총파업, 연장된 인민전쟁, 이중권력과 같이 혁명적 역량을 시공간적으로 집중시키는 전략에 대한 논의는, 때때로 사회적 위기와 제국주의 전쟁들의 결과로 再부상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요원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상세한 고찰의 대상이다. 군대는 항상 최후의 전쟁을 수행한다고들 하는데, 이는 마치 혁명가들이 언제나 최후의 (혹은 그 바로 직전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 IV >

두더지는 온 세상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낙담하지 않고 一心으로 지하로를 파 나간다. 헤겔에 따르면, 위대한 혁명들에 앞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조용하고 은밀한 혁명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두더지는 근시다. 그러나 그의 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두더지가 지하에 잠복해서 계속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블랑키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스테픈을 거쳐 발터 벤야민에 이르기까지,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패배는 평화로운 꿈이라기보다 깨어나야 할 악몽에 가깝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역사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삼촌에서 조카로, 나폴레옹 대왕에서 小나폴레옹으로, 1848년 6월의 학살에서 파리코뮌에 종지부를 찍은 피의 주간으로 웅얼거리고 더듬으며 나아간다. 마르크스 또한 재개하고 반복하며, 현현을 위해 과거를 소환한다. 브뤼메르 18일의 늙은 두더지는 <햄릿>의 무대 아래를 서성거리는 시해당한 왕의 유령을 되살린다. 지표와 지하 사이에서 작고 조용한 혁명들은 위대한 혁명의 문턱을 향하는 불가피한 사전준비의 임무를 非영웅적 극기로서 수행한다. 그것은 가시적 문자 아래에서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자로서, 종종 가시적 문자를 수정하고 가끔 그것을 반박하기도 한다.

< V >

혁명은 사물의 일상적 흐름을 중단시키는,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그런데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의 환상의 파괴가 21세기에 어떠한 사건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돌이킬 수 없는 철저한 근대성의 시대 이래로, 혁명은 (1)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이름이거나 (2)발생해서 철저하게 부정되는 사건의 이름이었다. 지켜낼 만한 사건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켜내기를 바랄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이 끔찍한 변형체뿐이기 때문이다. 희망에 대한 이와 같은 손상은 다가올 세대들의 어깨를 오랫동안 짓누르고 미래를 캄캄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건 그 자체를 탈신성화하고 세속화된 역사와 정치로 되돌려놓는다면, 아직 체념하지 않고 이 손실을 이익으로 바꿀 시간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정치는 ‘역사의 법칙이라는 교활한 개념’에 맞서 저항할 사건의 가능성에 기반을 뒀다. 그러나 전쟁의 시련을 겪자마자 폴 발레리는 정치적 정신이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그만둬야 할 것인지를 自問하면서, 사건은 예측하지 못한 정황들을 즉각적으로 만들어내고 다시 그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 파장이 원거리까지 도달하므로, 낡은 역사와 정치의 형태와 관념이 당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탈근대적 수사는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위협한다. 지친 대서사의 말더듬기로부터 복화술의 상품이 등장한다. 역사는 영원한 현재 주위에서 주장을 철회한다. <자본>의 망령이 깨진 희망의 폐허를 배회한다. 도래하지 않는 사건을 기다리며 지평선을 바라보다 지친 초병들은 잠에 빠진다.

이와 같은 사건의 정치적 소멸을 막기 위해, 사건의 철학담론은 그것을 신비주의로 포장한다. 사건은 ‘無로부터 떠오른 것이므로’ 자신을 전례도 조건도 없는 절대적 시초이자 ‘스스로에 대한 전주곡’으로서 제시한다. 마치 연인의 첫 만남처럼, 그것은 일어날 것 같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영원히 자명하다.’

< VI >

사건과의 만남이 확실성을 흔들어 놓고 사물의 일상적 질서에 안주하려는 기만적 유혹을 파괴하지 못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놀랄 각오를 하고 불확실성을 맞이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계시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역사적 논리도 갖지 못하고 기적과도 같은 섭리의 질서를 강요할 뿐이다. 그 경우 세속적 정치는 생각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일로 化할 것이다. 역사적 신기원을 이루는 것은 사건에 내재한 특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위치, 즉 사건이 자신이 떠오른 상황과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

근대인이 처한 조건 하에서는 보장된 결과 없는 기획도 不在하거나 무의미한 기획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가능한 미래를 향한 헌신이다. 새로운 시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신비로운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사건의 비밀이다. 그런데 혁명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말하곤 했다. ‘우리는 언제나 중간지점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사건을 ‘가능한 것의 순수한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 돌리는 대신 그것을 그것의 위치를 결정하는 역사적 조건에 배치해야 한다. 기적은 신앙의 질서에 속하는 것인 반면, 사건은 이성적인 투사의 형태로서 정치의 조건들을 결정한다. 사건의 정치는 ‘시간 바깥의 사회주의’와도 결정론적 역사의 ‘법칙들’과도 결별한다. 1789년 바스티유 함락은 구체제의 위기를 통해 이성적으로 파악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전쟁의 발발과 러시아를 제국주의 질서의 가장 약한 고리로 만들었던 ‘러시아 자본주의 발달’의 특수성을 고려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1956년 그란마號의 상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존적이고 부패한 쿠바 부르주아지의 종속적 독재정치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의지의 명령이 결정의 환경에 조응할 수 있을 것이다.

< VII >

따라서 진정한 사건이란 오직 기억이 기대에 밀착하고 경험이 다가오는 사실을 맞이하는 임계점에만 존재한다. 그것은 기대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대에 反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때를 잘못 맞춘 조숙한 외양을 지닌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사건에 힘을 부여한다. 사건은 자신의 ‘미래로부터’ 힘을 얻는 것이다. 사건은 자기 안에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들’을 담지하고 있다. 이 사건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만이 이 새로움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후속사건이 前사건으로, 즉 가능성들의 뿌리로 되돌아가서 가능성들의 지평을 변경하고 ‘시간들의 혁명’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언론의 시간에는 내일이 없다. 사건과 소식의 대량생산자인 언론매체는 사건의 類似(semblance)를 저렴하게 공급한다. 특집호가 사건으로 간주되기 십상인 이 시대에 매체의 나팔소리는, 아무리 시끄럽다 해도, 어떤 벽도 허물지 못한다.

사건의 정치는 조숙함과 시기부적절함의 전략적 예술이다. 혁명이 일어날 만한 시기는 언제나 너무 이르고 준비가 불완전하다. 혁명에 대한 근대적 관념은 역사적 필연성을 사건의 우연성과 결합시키는 바늘땀으로서 나타난다. 정치적 행동은 그 결과의 불확실성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유한 우연성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연성은 가능한 것의 연약함과 효과적인 것의 일관성을 가리킨다. 우연성은 순전한 운으로도 불완전한 지식의 빈틈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그로써 정신이 사건의 옷을 입는 행동’으로 이해되는 역사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다.

이 ‘우연성 시험’은 종종 역사적 비합리성의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전제하고 있는 합리성을 사건의 불확실성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사건 없는 역사는 역사 없는 사건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사건은 오직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일의 ‘변화하는 결’을 통해서만 인식가능하다. 그러나 예견된 결말의 단순한 성취는 ‘우연성 시험’을 억누를 것이다.

< VIII >

그렇다면 사건은 어떤 ‘역사적 필연성’의 무작위적 일부분인가? 투쟁과 갈등의 필연성이다. 왜냐면 투쟁 자체만을 예견할 수 있으며, 투쟁의 결과물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봉건적 생산양식의 후손으로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 化한 화폐,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노동력, 기술혁신의 기이한 마주침(encounter)으로부터 솟아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건은 이 非필연적인 조합이 취하는 형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결정적 순간은 정치를 여러 개의 가상과 유일한 실제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의 결탁’으로서 정의한다. 메를로–퐁티는 ‘예지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세속적ㆍ비극적 자유는 영웅이나 성인과 달리 시대적 상황이 부여한 한계를 인지해야만 하며, 자신이 내린 결정의 불확실성, 즉 결정의 결과가 자신의 의도에 反할 위험에 항상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교조적 유혹과 냉소적 무관심의 유혹에 대한 해독제로서 정치적ㆍ역사적 판단을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변화시키기 위해 해석한다는 것이다. 또한 해석하는 과정에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 IX >

따라서 전략적 역사와 그 가능성들의 회고록은 성취된 사실의 진부함과 구분된다. 역사가들의 역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역사의 ‘의미’에 잘 들어맞는 사건은 자명한 것으로 서술하면서도 그 조류에 反하는 정책적 실수에 대해서는 얼버무린다. 역사가들은 실수, 실책, 누락의 일람표를 만들고 평가함으로써 회고적 지혜를 뽐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취된 사실의 이와 같은 등록부는 우연성을 필연성에 희생시키며, 가능한 것을 실재하는 것에 희생시킨다. 이런 역사서술과 달리 비판적 역사는 행위자들의 개입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독하고, 성취된 사실에 포로로 붙들린 가능성들을 해방시킨다.

마르크스는 정치를 ‘마주침의 우연성과 혁명의 필연성 사이에서 분열된 지평’ 위에서 사고했으며, 우발적 사건(accident)은 일반적인 발전도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데다 다른 사건들에 의해 보정되지만 한편으로 가속과 지연은 이 우발적 사건들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사변적인 역사철학을 버리고, 전쟁ㆍ혁명 등의 사건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자본>의 ‘경향으로서 작용하는’ 논리와 법칙 속에 새겨 넣었다. 그는 보편사의 섭리적 신비주의에 맞서 불확실성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은 다른 평형추들에 의해 加減이 보정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 역할은 거의 인지되지 않았다. 사건의 특이성은 또 다시 진보의 대서사 속에서 유실되었고, 정치적 우연성은 역사적 필연성 속으로 용해되었다.

이 같은 독해는 테르미도르와 그것의 재발의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혁명과 反혁명의 뒤얽힘은 부르주아 혁명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들의 차이로, 그것도 그 결과물이 보장되는 차이로 환원된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부르주아 혁명은 초기의 극적이고 환희에 가득 찬 성공이 정점을 거치고 나면 결국 취기에서 깨어나 질풍노도의 성취를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계속해서 패배하지만, 언젠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진전되고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가올 궁극적 승리를 예견한다. 따라서 사회혁명은 오직 전진하기 위해서 후퇴할 뿐이다. 혁명이 찬란한 일출처럼 빛난다면, 反혁명은 구부정하고 칙칙하며 사건에 뒤따라 너무 늦게, 즉 이미 혁명이 일어난 연후에야 일어난다. 혁명과 反혁명은 같은 시간적 축 위에서 전진하고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대칭적이지 않다. 반동의 전문가인 조제프 드 메스트르에 따르면, 反혁명은 반대방향으로 일어나는 혁명, 반전된 혁명, 퇴행적 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정반대’다.

< X >

메를로–퐁티는 혁명은 ‘운동으로서는 진실하지만 체제로서는 거짓’이라고 말했다. 만하임은 제도적 질서는 언제나 이상향의 불길한 잔여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알랭 바디우에게 테르미도르는 사건의 종말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종말은 사건의 쇄도만큼이나 갑작스럽고 기적적인 것이며, 사회적ㆍ역사적 반동이기보다 ‘신념의 배반’에 가깝다. 사건의 개방성과 그것의 관료제적 폐쇄의 교대는 드물게 나타나는 출현의 순간들로 환원된 정치의 斷續性을 확증한다.

마르크스에서 트로츠키까지, 영구혁명의 역설적 공식은 사건과 역사의, 단절과 연속의, 행동의 순간과 과정의 지속의 문제적 매듭을 가리킨다. 메를로–퐁티는 트로츠키에게서 역사적 이성은 더 이상 세계라는 기차를 추진하는 세속화된 신성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역사가 목적론과 경제결정론으로부터 해방되었다지만, 그는 예견된 결말 속에 신앙의 자취가 있지는 않은지 의심한다. 발생론적 관점에서 보면, 혁명의 각 단계의 싹이 前단계에서 돋아난다는 진화론적 혁명관을 보여주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은 보장된 과정의 세속적 겉꾸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구혁명’은 기계적 단계주의에 反하는 수행적(performative)이고 전략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다. 그것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혁명과 확장된 혁명 간에 설정된 가언적ㆍ조건적인 연결고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혁명적 변형은 제헌권력이 테르미도르적 石化작용에 맞서는 ‘되풀이되는 내적 투쟁’의 차원을 획득한다.

< XI >

저항, 사건, 역사의 관계는 위기의 전략적 개념에서 성취된다. 위기(crisis)는 어원적으로 결단과 진실의 순간을 의미한다. 즉 위기란 분기점에 도달한 역사가 옆으로 펼쳐진 가능성의 경로들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순간인 것이다. 위기는 근대성의 특징적인 주제로서 진보의 어두운 측면을 대표한다. 위기는 의학용어로 출발해서 경제용어였다가 정치적인 용어가 되었다. 새로운 문명 속의 불만의 증상으로서의 탈근대주의 담론이 목적 없는 행동의 ‘우울한 잔혹성’에 호의적으로 되어가는 것과 반대로, 정치적인 의미의 위기란 불만(discontent)의 적극적인 부분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더지는 흘끗 빛을 본다.

위기는 마르크스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 명백하게 전략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다. 그때부터 위기는 가능성의 場을 교란시키는 ‘사실의 매듭’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것은 적대관계를 명확하게 만들고, 모순들 간에 위계를 확립하며, 사회적 율동들들 결합하고, 複數의 애착과 지향성을 풀어낸다.

마르크스는 유럽이 17세기 이래로 ‘상업ㆍ금융 위기가 선행하지 않은’ 급진적 혁명을 겪은 적이 없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주기적이고 불가피한 상업적 위기가 매번 더 심각하게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재를 시험대에 올리며, 상업적 위기를 뒤따르는 법인 역병이 사회를 일시적 야만상태로 되돌린다. 이 때 위기는 되풀이해서 극복해야 하는 갈등이자 그 속에서 깨진 균형이 폭력적으로 재확립되는 형식으로서 제시된다. 이런 식의 진단은 미셸 도브리가 ‘인과관계의 환상’이라 부르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상업적 위기가 혁명적 위기에 선행한다는 사실이 그 둘 사이에 ‘역병’이라는 의학적 은유가 확증해주는 직접적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시간적 전후관계를 단순하게 인과관계로 해석하지 않으며, 그에게서 경제위기는 기계적으로 정치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일 뿐이다. 위기를 혁명적 위기로 변환시키는 것은 그 순간의 전략적 기회를 붙잡는 행위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명확한 기획을 가진 일관된 세력의 행동이 결과를 낳기 위한 결정적 조건이 된다. 즉 레닌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몰락하는’ 정부따위란 없으며, 모든 혁명적 상황이 혁명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변화에 주관적 변화가 덧붙여져야만, 다시 말해 혁명적 계급이 정부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혁명적 대중행동을 이끌고 나아가야만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위기의 결과물은 둘 이상의 주인공이 풀어내는 것이며, 그들은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안정적인 등장인물들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 XII >

1970년대 중반 이래로 세계는 단명한 경제적 상승이 해산시키지 못한 위기의 분위기 속에 눌러 앉았다. 사회적ㆍ생태적ㆍ기술적 미래는 근심과 위험으로 인해 음울해졌다. 정의할 수 없는 위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서성댄다. 이것은 산업ㆍ금융 위기와는 다른, 문명 속의 새로운 불만으로서, 사회관계와 인류–자연 관계의 전지구적 위기이자 공간과 율동의 일반적 무질서화다. 네그리의 논의를 따르면 대규모 위기는 근대성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리좀처럼 뻗어나가는 ‘小위기들’이 탈근대적으로 증식할 것이다. 국가주권이 전지구적 제국의 그물코 속에서 해체되고 있다는 소식이 새어나온 마당에, 식별가능한 권력의 위기가 ‘부패’의 小위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위기 개념은 그 의미와 기능이 변할 것이다. 위기는 더 이상 구조물의 구멍이나 연속성의 단절이 아니라, 역사의 긴요한 일부가 되고 ‘역사의 일반적 경향’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네그리가 피한다고 주장했던 파멸적 어조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에 비해 마르크스는 자본이 스스로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어간다고 더 차분하게 지적했다. 오늘날 이 모순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것인가? 우리는 무너지고 멸망한 수많은 제국과 문명을 보아 왔다. 역사는 길고 평화로운 강줄기가 아니며, 역사에는 보장된 행복한 결말이 없다. 역사에서 결과물은 미리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에 제시된 대안들, 즉 해방이냐 야만이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 세계대전에서 핵폭격에 이르기까지, 대량학살에서 환경재해에 이르기까지, 야만은 상당한 정도로 해방을 앞질러 나아갔다. 위기는 단순한 ‘역사적 전환점’과는 꽤 다른 어떤 것으로서, 즉 大이행이자 결정적인 교차점으로서, 상황의 제약과 행동의 우연성이 합류하는 곳으로서 나타난다.

아직은 재앙을 막을 수 있다. 만일 ......
우리가 스스로 이 답을 찾는 데 전념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것이야말로 두더지가 하는 일이다.

< XIII >

헤겔은 새로운 정신의 등장에 선행한 ‘조용하고 은밀한’ 혁명을 묘사했다. 두더지는 ‘서두를 필요가 없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며 ‘시간이 많다.’ 그래서 두더지는 서두르지 않는다. 두더지가 물러서는 것은 겨울잠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굴을 파기 위해서다. 그의 일탈과 후퇴는 그가 튀어나오려고 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그를 이끈다. 두더지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림: 김원기)

네그리는 이 두더지의 은유가 탈근대주의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늙은 두더지가 드디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두더지의 은유는 뱀의 굽이침과 파충류의 투쟁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런 판결은 탈근대성이 근대성을 계승한다는 연대기적 환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두더지는 양가적이다. 두더지는 근대적인 동시에 탈근대적이다. 그는 ‘지하의 리좀들’ 속에서 바삐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우레같이 들고일어난다.

탈근대성의 철학담론은 역사적 대서사를 폐기한다는 구실로 밀교(mystics)와 그 사제들(mystagogues)을 편애했다. 예언가가 사라진 사회에는 점쟁이들이 있는 법이라고 샤토브리앙은 말했다. 점쟁이는 반동과 복고의 시대에 적합하다. 1848년 6월의 학살과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그리스도숭배(christolatry)’에 사로잡혔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예언자를 점쟁이와 대조시키면서 예언자의 조건적ㆍ예방적ㆍ수행적 언어를 들어 보였다. ‘사제가 일상적 질서에 속하는 것과 달리, 예언자는 확립된 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미래가 보류되는 순간인 위기상황에 속하는 자다.’ 예언자는 사제가 아니며, 성인도 아니다. 점쟁이는 더욱 아니다. 예언자는 차라리 전략가다.

위기를 물리치는 데는 사건에 의한 가상적 구원에 도박을 거는 자들이나 계획되지 않은 저항들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1)역사의 논리와 (2)사건의 非계획적 본성 양편 모두에 확고하게 발붙이고 서서, 前者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後者의 우연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행동의 과제다. 정신은 텅 빈 시간 속에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가득 찬, 투쟁으로 가득 찬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두더지가 그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두더지는 느긋한 조바심과 황급한 인내심을 갖고 사건의 도래를 준비한다. 두더지는 예언자 같은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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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프랑스혁명 은 부르주아혁명 이 아니었는가? - 역사서술의 유산 - 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 마티아스 미델(Matthias Middell)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마티아스 미델 이 글의 목적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지의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연구는 축소되었다. 게다가 이 ‘나머지 유럽’의 연구에는 어떤 동질성도 없다. 또 주변부가 흔히 그렇듯이, 이 ‘나머지’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불명확하며,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학회나 주제별 학술지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1960년 스톡홀름과 1990년 마드리드의 세계학술대회 사이에 이 ‘나머지 유럽’은 많은 혁명사가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가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구심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les Daline, Lesnodorski, Mejdricka, Benda, Töennesson, Markov, Galanta Garrone, Saitta 등)이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운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은 파머(Robert Palmer)와 소불의 작업에서 공통언어를 발견했다. 이 유럽의 ‘학파’ 외에도 혁명사 연구자로 호주의 루데, 일본의 타카하시, 중국의 장지량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진 소불―퓌레 논쟁의 결과로 1960년대 말부터 혁명의 사회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혁명정치를 사회적 조건으로써 설명했으며, 하층민 연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루데, history from below)’에 초점을 맞추었다.(소불의 상퀼로트 연구와 르페브르, 아도, 달린, 타카하시의 농민 연구) 그러나 다수는 정치사에 몰두했다.(혁명력 3년 상퀼로트의 패배, 혁명군 등) 네 권짜리 자크 루(Jacques Roux) 전기를 쓴 동독의 마르코프처럼 한 인물에 집중하는 사가도 있었다. 자기비판은 나중에 나타났다. 마르코프는 일단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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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김대보  한국교원대  “왕과 귀족은 평민이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찬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모을 국민의회를 결성했고, 성난 시민들은 왕권유지를 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습격했다.1) 그리고 이 습격사건은 최초의 민주화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전 세계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바스티유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은 그곳에 정치범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민중들에 의해 영웅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4년 후, 절대권력이던 루이 16세는 시민들 손에 이끌려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완성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유죄가 되기 전에 왕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과거의 치욕을 복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치욕은 루이르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를 지나가던 루이 16세 앞에서 학생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가 무릎을 꿇고 시를 읊었지만, 루이 16세가 시큰둥하게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통하지 않은 왕의 말로가 비참했다. 이제 민중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국민에 의한 국민공회가 만들어졌고, 3인방(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이 주도했다. 민중들은 혁명이 오면 신세계가 올 줄 알았는데, 이 세 사람이 독재를 시작했다. 여기서 마라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몇 달 안에 십만 명만 죽이게 해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라를 죽인 사람이 코르데인데, 심문 과정에서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답했다. 코르데는 공포정에 맞섰던 암살천사였다. 당시 사람들이 코르데의 미모를 보고 반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라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도 암살당할 수도 있다면서 더 무섭게 독재를 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