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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 마티아스 미델(Matthias Middell)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마티아스 미델 이 글의 목적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지의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연구는 축소되었다. 게다가 이 ‘나머지 유럽’의 연구에는 어떤 동질성도 없다. 또 주변부가 흔히 그렇듯이, 이 ‘나머지’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불명확하며,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학회나 주제별 학술지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1960년 스톡홀름과 1990년 마드리드의 세계학술대회 사이에 이 ‘나머지 유럽’은 많은 혁명사가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가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구심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les Daline, Lesnodorski, Mejdricka, Benda, Töennesson, Markov, Galanta Garrone, Saitta 등)이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운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은 파머(Robert Palmer)와 소불의 작업에서 공통언어를 발견했다. 이 유럽의 ‘학파’ 외에도 혁명사 연구자로 호주의 루데, 일본의 타카하시, 중국의 장지량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진 소불―퓌레 논쟁의 결과로 1960년대 말부터 혁명의 사회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혁명정치를 사회적 조건으로써 설명했으며, 하층민 연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루데, history from below)’에 초점을 맞추었다.(소불의 상퀼로트 연구와 르페브르, 아도, 달린, 타카하시의 농민 연구) 그러나 다수는 정치사에 몰두했다.(혁명력 3년 상퀼로트의 패배, 혁명군 등) 네 권짜리 자크 루(Jacques Roux) 전기를 쓴 동독의 마르코프처럼 한 인물에 집중하는 사가도 있었다. 자기비판은 나중에 나타났다. 마르코프는 일단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