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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vs 진보는 분열로 성공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 게 아니라 분열을 통해 시대정신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은 헛소리라는 글을 누군가 보여줬다. 글쎄

이건 “망한다”는 말의 의미를 '뜻을 이루지 못한다'로 새긴 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문장을 비판한 셈인데, 이런 비판은 현대 정당정치에서 진보세력이 수행하는 일정한 역할에 대한 좋은 고찰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 비판은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널리 퍼진 테제에 대한 직접적 비판으로는 유효하지 않다. 왜냐면 그 널리 퍼진 테제에서 “망한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집권에 실패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분열하기 때문에 집권에 실패한다, 혹은 분열하기 때문에 집권해도 그 권력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실효적인 정책적 성과를 충분히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진보가 끝없이 자기분열하며 논쟁과 전파를 통해 '시대정신'을 끌어올린다는 말은, 그 자체로 유효한 견해이되, 시중에 널리 퍼진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잘못됐다는 주장의 근거로서는 부적절하다. 그것은 오히려 논의의 초점을 타협-집중-집권이라는 '전략'에 맞출 것이 아니라 분열을 통해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원칙을 드높임으로써 '목표'를 교정하는 '전략'에 맞추자는 제안이다. 나로서는 둘 다 마땅히 필요하고 둘 다 마땅히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소거하거나 대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진보는 분열함으로써 '성공'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데, 이 때 진보가 분열하면서 이루는 목표는 똘똘 뭉침으로써만 이룰 수 있는 목표와 전략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지점이 있다. 아주 뛰어난 민주정치가 정착되어 있거나 또는 그 나라가 운이 좋아서 아주 뛰어난 지도자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왜 그런가? 누군가가 질적으로 수준을 높여둔 사회의 화두를 정책으로 탈바꿈시키려면, 그 화두를 둘러싸고 서로 충돌하는 입…

중세 유럽, 여성의 가슴 크기/모양의 의미에 관한 문화사 논문 (K. M. Phillips)

이 그림은 중세에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진 여성의 가슴의 크기와 모양을 보여주는 한 예시로 아래 논문에 인용되었다.


중세 유럽, 여성의 가슴은 너무 크지 않은 것이 아름답다는 미적 관념이 존재했고, 이것에 맞추기 위해 가슴이 커지는 것을 막아준다는 각종 의술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었다.

그런데 아래에 링크된 최근 논문에 따르면 가슴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은 단지 미적인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성적 평판을 유지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즉 성관계 경험이 많은 여성일수록 가슴이 더 크다는 관념이 존재했고, 성관계 경험이 많다고 "오해"받지 않기 위해 여성들은 혹시라도 가슴이 커지지 않도록 유난히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온갖 의학적 (주로 식초, 약초 등을 사용하는 식이요법) 조언들이 통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여성의 가슴 모양만 봐도 처녀인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체계가 존재했던 것인데, 몇백 년 뒤 출현할 이른바 과학적 인종주의도 그렇고 참 인간이 만들어내는 지식체계가 때로는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 ...

Kim M. Phillips, 'The Breasts of Virgins: Sexual Reputation and Young Women’s Bodies in Medieval Culture and Society', Cultural and Social History, 15:1 (2018), pp. 1-19.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14780038.2018.1427341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 마티아스 미델(Matthias Middell)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마티아스 미델
이 글의 목적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지의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연구는 축소되었다. 게다가 이 ‘나머지 유럽’의 연구에는 어떤 동질성도 없다. 또 주변부가 흔히 그렇듯이, 이 ‘나머지’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불명확하며,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학회나 주제별 학술지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1960년 스톡홀름과 1990년 마드리드의 세계학술대회 사이에 이 ‘나머지 유럽’은 많은 혁명사가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가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구심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les Daline, Lesnodorski, Mejdricka, Benda, Töennesson, Markov, Galanta Garrone, Saitta 등)이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운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은 파머(Robert Palmer)와 소불의 작업에서 공통언어를 발견했다. 이 유럽의 ‘학파’ 외에도 혁명사 연구자로 호주의 루데, 일본의 타카하시, 중국의 장지량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진 소불―퓌레 논쟁의 결과로 1960년대 말부터 혁명의 사회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혁명정치를 사회적 조건으로써 설명했으며, 하층민 연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루데, history from below)’에 초점을 맞추었다.(소불의 상퀼로트 연구와 르페브르, 아도, 달린, 타카하시의 농민 연구) 그러나 다수는 정치사에 몰두했다.(혁명력 3년 상퀼로트의 패배, 혁명군 등) 네 권짜리 자크 루(Jacques Roux) 전기를 쓴 동독의 마르코프처럼 한 인물에 집중하는 사가도 있었다.



자기비판은 나중에 나타났다. 마르코프는 일단의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