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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년 파리, 볼테르와 프랭클린의 만남

볼테르는 1778년에 드디어(!) 참으로 오랜만에 파리에 갔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자 방문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도착한지 1주도 되지 않아 프랭클린이 손자를 데리고 볼테르를 방문했다. 프랭클린이 볼테르에게 손자를 축복해달라고 부탁했다. 콩도르세, 트롱섕, 빌레트, 바녜르 등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84세 노인은 프랭클린의 8살 난 손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능숙한) 영어로 "신과 자유"라고 축복했다. "아가, 신과 자유, 이 두 단어를 기억하거라." 훗날 콩도르세는 이것이야말로 프랭클린의 손자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축복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과학 학술원에 들른 볼테르는 거기서 또 프랭클린과 마주치는데, 현장에 있었던 존 애덤스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의 과학자들이 볼테르와 프랭클린의 악수에 만족하지 않고 "프렌치 키스"를 할 때까지 광분 상태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에피네 부인의 증언도 흥미롭다: 왕족이 나타나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볼테르가 재채기를 하고 프랭클린이 "God bless you"라고 반응하면 사람들이 다시금 열광했다는 것이다.
최근 글

지금 와서 알아봤자 별 쓸모없는 18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의 문명사 논쟁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 궁정에 있던 코르넬리우스 데 파우(Cornelius Franciscus de Pauw)는 1770년에 인류 “문명”이 중국이 아닌 이집트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볼테르(François Marie Arouet, “Voltaire”)는 1776년에 데 파우를 직접 거명하며 문명은 중국도 이집트도 아닌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먼저 중국에 전파된 다음에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했다. 훗날 혁명기 파리 최초의 시장(1789년 7월부터 1791년 11월까지)이 될 운명이었던 천문학자 바이이(Jean Sylvain Bailly)는 볼테르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칭송했으나 이 문제에서만큼은 의견을 달리 해서, 인도인들 이전에 이미 인류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약하게 태어나 천수를 누린 볼테르

볼테르(François-Marie Arouet / Voltaire)는 너무 작고 연약하게 태어나서 세례를 받으러 성당까지 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성사를 치렀다. 한동안 집에 간호사가 상주하며 매 시간마다 산모에게 아기가 곧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 그러나 그는 84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길이 이름을 남겼다.

지식인과 정치적 격변 : 지롱드파, 산악파, 프랑스혁명

정치적 격변의 상황에서 가장 한심한 것은 지롱드파/브리소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브리소, 콩도르세, 베르니요, 귀아데, 롤랑, 올랭프 드 구즈, 뷔조, 루베 등). 이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싸워왔으므로 민중이 자기들을 치켜세우고 알아보고 인정해주고 존경해줘야 한다고 내심 믿고 기대한다. 이들은 진보언론 대부분을 쥐고 있으며 (1791~1793년 지롱드파는 대부분 언론인 또는 지식인 출신임), 로베스피에르가 민중의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잘난 머리로 온갖 비전을 내세우지만, 진정 사람 사는 모습을 깊이 알지 못하고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무지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예측이 번번이 빗나갈 때마다 민중의 무지와 야만성을 탓하고 로베스피에르를 탓한다.



지롱드파가 자신을 국회에서 제명하려 하자, 로베스피에르가 말했다. "시민들이여, 여러분은 혁명 없는 혁명을 바랐습니까? .... 수도의 민중은 전 지역의 국민들을 대신해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민중의 행동 일체를 한꺼번에 승인하거나 비난해야 합니다. 이런 큰 (정치적/감정적) 격변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몇 가지 옳지 못한 행동들을 범죄로서 처벌하면 우리는 결국 열정적으로 헌신했다는 이유로 민중을 단죄하는 셈이 됩니다...." (1792년 11월 5일)

한 평생 책만 읽고 직업상 옳은 말만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지롱드파/브리소파가 되지 않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단 훨씬 쉽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이 항상 옳으니까 그들을 옹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민중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그 선함이 부패한 정치와 엘리트 통치에 대한 분노로 오염되어 있을 때, 그 분노의 폭발을 뻔한 도덕률로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번번이 지적했을 뿐이다. 정작 학살과 전쟁에 책임이 있는 지롱드파/브리소파(전쟁 개시 책임, 민중의 파리 감옥 학살 발생시 내무부장관직과 파리시장직 모두 장악)…

Against some big books on the history of democracy out there

[.....] Le romantisme a opéré rétroactivement sur le classicisme, comme le dessin de l'artiste sur ce nuage. Rétroactivement il a créé sa propre préfiguration dans le passé, et une explication de lui-même par ses antécédents. C'est dire qu'il faut un hasard heureux, une chance exceptionnelle, pour que nous notions justement, dans la réalité présente, ce qui aura le plus d'intérêt pour l'historien à venir. Quand cet historien considérera notre présent à nous, il y cherchera surtout l'explication de son présent à lui, et plus particulièrement de ce que son présent contiendra de nouveauté. Cette nouveauté, nous ne pouvons en avoir aucune idée aujourd'hui, si ce doit être une création. Comment donc nous réglerions-nous aujourd'hui sur elle pour choisir parmi les faits ceux qu'il faut enregistrer, ou plutôt pour fabriquer des faits en découpant selon cette indication la réalité présente ? Le fait capital des temps modernes est l'avènement de la démoc…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

폐허, 볼네, 에드워드 기번, 그리고 18세기의 로마

매년 천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다는 로마의 옛터는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이라 하고 이탈리아어로는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한다. 2천년이 안 된 유적지는 제대로 취급도 안 하는 로마의 관광산업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곳으로, 콜로세움과 더불어 로마 관광의 양대산맥이다. 매일같이 구름 같은 관광객을 볼 수 있다.


잘린 기둥 조각에 앉아 있노라면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고,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연설을 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그것을 듣고, ...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볼네의 1791년작 <폐허>는 주인공이 고대 로마의 이 폐허에 앉아서 이곳을 메웠을 인파와 공화국, 그리고 제국의 스러져간 영광을 떠올리고, 이따금 사제만이 외로이 이 곳을 지나가는 광경을 보고 "어째서 모든 문명은 결국 쇠락하고야 마는가? 문명이, 국가가, 제국이 멸망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된다.


그 전에 이미 기번이 1776년작 <로마제국쇠망사 제1권>을 쓸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이 곳에서 마찬가지의 상상을 하면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세기에 로마의 옛 광장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관리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을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대개 상인들뿐 아니라 소, 양, 말도 다녔다.

기번과 볼네가 쓰러진 로마의 기둥에 앉아 소를 보며 공화국의 덕성과 제국의 영광을 상상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부패한 노예상인이자 영란은행 총재, 험프리 모리스

험프리 모리스(Humphry Morice), 1671년생, 1731년 사망. 휘그파에 속하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상인이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사들여 노예선으로 수송해 아메리카에 판매하는 (이 항해 과정은 아주 가혹했으며, 많은 흑인들이 죽었다)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이 악랄한 부자는 정계에 입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중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 총재까지 되었다. 그는 은행자금을 £29,000이나 횡령했고 가족들의 돈까지 빼먹었으나 사후에도 빚을 £150,000나 남겼다.

그가 당시 횡령한 금액은 2017년 물가로 환산하면 £4,800,000나 되는데도 죽을 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2,000,000나 되는 빚을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은행은 그의 사후 횡령액을 돌려받기 위해 미망인을 상대로 43년 동안이나 소송을 진행했지만 결국 £12,000을 돌려받는 데 그쳤다.

이런 인간 이하의 인간도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다비드 르마르샹(David Le Marchand)이라는 프랑스 조각가가 아프리카산 상아로 조각품을 만들어줬고, 넬러(Godfrey Kneller)라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줬다.

메모 : 데리다에 대한 베어링의 접근법

에드워드 베어링의 "초기 데리다"의 서론 :

1) 데리다의 유년기에서 정신분석학적 결론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데리다가 젊은 학자 시절에 속했던 ENS 중심의 파리의 지적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2) 데리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너무 많은 함의를 도출할 게 아니라 데리다 사상이 당대 기독교 사상과 주고받은 대화를 읽어내야 한다.

출처 : Edward Baring, The Young Derrida and French Philosophy, 1945-1968 (2011)


* 상반되는 기존 해석 : Martin Hägglund, Radical Atheism: Derrida and the Time of Life (2008)

러시아혁명 100주년 :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John Reed,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New York, 1919)


I. 개요

언론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전 세계 유수 언론사의 신입기자 교재로 쓰일 정도로 1917년 10월 혁명에 관한 르포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레닌이 서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흥미롭고,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다. 본문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혁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1월 농민대회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II. 서술방식

리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역사의 일부분을 서술한다는 자세로 저술에 임했다. 리드는 각종 개념을 사용하는 역사적 분석을 최소화하고 르포의 맛을 살렸다. 결과적으로 그의 글은 비록 일방의 관점이 짙게 반영되어 있음에도 후대에 소중한 사료가 되었다. 리드는 자신의 직접 체험, 간접 경험, 큰 틀에서의 분석을 버무려 썼다.

리드는 어느 상인 가족 이야기, 만찬 이야기, 보수인사와의 인터뷰, 트로츠키와의 인터뷰, 집회 목격담, 거리에서 관찰하고 체험한 병사 및 노동자들의 언행과 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리드는 자신의 입장을 세울 때 종종 위와 같은 관찰기록을 덧붙여서 주장에 무게를 더했다. 그는 집회에서의 노동자의 발언, 병사의 발언, 농민의 발언, 지도자들의 발언과 그에 대한 청중의 반응까지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는 겨울궁전 습격이 얼마나 무혈혁명에 가까웠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부르주아 언론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으로 둔갑시켰는지도 실감나게 썼다. 그렇게 쓰기 위해서 리드는 주요 사건이 터지는 곳마다 몸소 달려가서 글감을 뚫었다.


III. 혁명에 대한 입장

리드는 혁명에 대한 깊은 경탄과 존경을 표시했다. 그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었으며 볼셰비키의 등장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다”고 썼다. 그의 견지에서, 10월의 봉기는 “고통 받는 민중을 이끌고 역사에 뛰어든, 또 민중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

사르트르, 카뮈, 아버지 없음에 대하여

장-폴 사르트르의 모친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슈바이처 박사의 사촌인 안-마리 슈바이처였고, 부친은 프랑스 해군 장교 장-바티스트 사르트르였다. 장-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장-바티스트는 해외에 주둔중이었고, 귀국하지 못한 채 2년 뒤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사르트르는 훗날 이를 두고 자전소설 "말"에서 아버지가 일찍 죽은 것은 잘 한 일이었다고 평했다. 자신에게 초자아를 부과할 기회를 얻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행복했을까.


알베르 카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아의 몽도비(지금은 드레앙)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스페인 핏줄이었고 문맹이었다. 부친은 알자스 집안의 가난한 농촌노동자였다. 부친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마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1914년 10월 11일에 부상병동에서 사망했다. 카뮈의 극도로 가난한 유년기는 그의 미완성 자전소설 "최초의 인간"에 잘 그려져 있다. 카뮈는 "아버지 없음"에 대해 몹시 민감했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벽이자 자신의 자산으로 삼았다.

카뮈는 행복했을까.

사르트르와 카뮈는 어떤 이들에게는 든든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바이다의 영화 <당통>

바이다(Andrzej Wajda)의 영화 <당통(Danton)>은 1) 로베스피에르를 부정적 인물로 재현하고 당통에게 과도하게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2) 그리고 폴란드의 바웬사를 당통에 대입했다는 이유로 개봉 당시 프랑스 진보지식인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적 혁명사가 중 대가이자 대인배인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는 이 영화가 로베스피에르를 재현한 방식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한 바 없지만, 바이다의 영화에서도 나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바이다의 로베스피에르는 광인이 아니며 환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그는 의연하다. 그는 만인의 행복을 바란다고 믿으며, 인민을 보호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그는 폭력의 해악을 명철하게 자각하고 있다. 또 그는 폭력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곳으로 모으려 한다. 물론 영화에서 피비린내 나는 인물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런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마티에類의 공감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선의를 갖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통치의 역사에서 독특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린 한 정치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공안위원회 집무실에서 우리의 근대성이 태어난 것이다. 작품은 학문적 작업에 독특한 보조제의 역할을 한다. 작품을 그 자체로 환영해야만 한다.”


메모 : 루소는 홉스의 어떤 글을 읽었던가?

루소가 홉스의 글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한 내용은 주로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에 담겨 있다.

그런데 루소가 홉스의 저서 중 <시민론(De cive, 1642)> 외에 다른 글을 읽었다는 증거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며, 루소가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을 읽었으리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출처 : Robin Douglass, Rousseau and Hobbes: Nature, Free Will, and the Passio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p. 191.


퍼거슨(Adam Ferguson)의 정치사상

에든버러대학 도덕철학 교수였던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이 한국에서 마치 18세기 공화주의의 화신인 것처럼 언급되는 것을 가끔 목격하곤 하는데, 퍼거슨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화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그는 당대의 일반적인 상식을 그대로 따라, 민주정이 "최악의 정부형태"라고 단언했다. 또 그는 공화정은 노예 노동에 입각한 고대의 농업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분업과 상업이 널리 침투한 근대사회에서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대국이 공화정을 도입할 경우 순식간에 중우정치의 늪에 빠져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자유는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크게 보아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민주정은 군사정권으로 귀결된다"는 당대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국 헌정이나 고대 및 중세사에 대한 퍼거슨의 세세한 분석에 대한 소개는 생략)


퍼거슨이 내놓은 근대 상업사회용 맞춤형 대안은, 지금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시민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적 귀족(특권계급)"을 형성해서 "혈통의 귀족" 및 "부의 귀족"에 맞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 사람들이 혈통과 돈만 존경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로도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능력주의"의 사다리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군사귀족이 기존의 정치계급의 권력독점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메모 : 데리다, <인간의 종말>

발췌 - 자크 데리다, '인간의 종말(Les fins de l’homme)'

佛文 145:1~147:0

이제 우리는 현상(phainesthai)의 사유를 목적(telos)의 사유에 연결하는 필연성을 이해하게 됐다. 동일한 통로를 통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지배하는 목적론(téléologie)을 읽을 수 있다.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인류/인간성(humanité)”은 여전히 그것을 향해 초월론적 목적(telos)이 자신을 알리는 존재의 이름이다. 이 때 초월론적 목적(telos)은 칸트적 의미의 이념(Idée)으로, 또는 심지어 이성(Raison)으로 규정된다. 목적론적 이성의 전개, 다시 말해 역사가 전개될 장소를 지정하는 것은 가장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설에서도 이성은 곧 역사며, 역사는 오직 이성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이성은 “모든 인간에서, 아무리 원시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성적 인간인 모든 인간에서 작동한다.” 모든 종류의 인류/인간성과 인간적 사회성은 “인간적 보편성의 본질적 요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성을 관통하며 가로지르는 목적론적 이성이 이 뿌리 안에서 자신을 알린다. 이와 함께 독자적인 문제제기(또는 일단의 문제들)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의 전체성과 관계하며, 최종적으로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전체의미와 관계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인류/인간성을 가로지르는 이성의 목적론의 궁극적 실현이다. 따라서 후설이 필요할 때마다 현상학적 표지(indice)나 괄호(guillemets)로 영향을 미치면서 소생시키고 복원시킨,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의 권위 하에서, 경험론적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초월론적 인간주의를 단언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후설의 추론에서 본질적 자원을 형성하는 이 형이상학 개념들 중에서, 종말(fin)과 목적(telos)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상학의 모든 단계에서, 또 특히 “칸트적 의미의 이념”에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