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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
최근 글

폐허, 볼네, 에드워드 기번, 그리고 18세기의 로마

매년 천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다는 로마의 옛터는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이라 하고 이탈리아어로는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한다. 2천년이 안 된 유적지는 제대로 취급도 안 하는 로마의 관광산업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곳으로, 콜로세움과 더불어 로마 관광의 양대산맥이다. 매일같이 구름 같은 관광객을 볼 수 있다.


잘린 기둥 조각에 앉아 있노라면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고,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연설을 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그것을 듣고, ...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볼네의 1791년작 <폐허>는 주인공이 고대 로마의 이 폐허에 앉아서 이곳을 메웠을 인파와 공화국, 그리고 제국의 스러져간 영광을 떠올리고, 이따금 사제만이 외로이 이 곳을 지나가는 광경을 보고 "어째서 모든 문명은 결국 쇠락하고야 마는가? 문명이, 국가가, 제국이 멸망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된다.


그 전에 이미 기번이 1776년작 <로마제국쇠망사 제1권>을 쓸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이 곳에서 마찬가지의 상상을 하면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세기에 로마의 옛 광장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관리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을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대개 상인들뿐 아니라 소, 양, 말도 다녔다.

기번과 볼네가 쓰러진 로마의 기둥에 앉아 소를 보며 공화국의 덕성과 제국의 영광을 상상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부패한 노예상인이자 영란은행 총재, 험프리 모리스

험프리 모리스(Humphry Morice), 1671년생, 1731년 사망. 휘그파에 속하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상인이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사들여 노예선으로 수송해 아메리카에 판매하는 (이 항해 과정은 아주 가혹했으며, 많은 흑인들이 죽었다)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이 악랄한 부자는 정계에 입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중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 총재까지 되었다. 그는 은행자금을 £29,000이나 횡령했고 가족들의 돈까지 빼먹었으나 사후에도 빚을 £150,000나 남겼다.

그가 당시 횡령한 금액은 2017년 물가로 환산하면 £4,800,000나 되는데도 죽을 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2,000,000나 되는 빚을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은행은 그의 사후 횡령액을 돌려받기 위해 미망인을 상대로 43년 동안이나 소송을 진행했지만 결국 £12,000을 돌려받는 데 그쳤다.

이런 인간 이하의 인간도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다비드 르마르샹(David Le Marchand)이라는 프랑스 조각가가 아프리카산 상아로 조각품을 만들어줬고, 넬러(Godfrey Kneller)라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줬다.

메모 : 데리다에 대한 베어링의 접근법

에드워드 베어링의 "초기 데리다"의 서론 :

1) 데리다의 유년기에서 정신분석학적 결론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데리다가 젊은 학자 시절에 속했던 ENS 중심의 파리의 지적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2) 데리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너무 많은 함의를 도출할 게 아니라 데리다 사상이 당대 기독교 사상과 주고받은 대화를 읽어내야 한다.

출처 : Edward Baring, The Young Derrida and French Philosophy, 1945-1968 (2011)


* 상반되는 기존 해석 : Martin Hägglund, Radical Atheism: Derrida and the Time of Life (2008)

러시아혁명 100주년 :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John Reed,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New York, 1919)


I. 개요

언론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전 세계 유수 언론사의 신입기자 교재로 쓰일 정도로 1917년 10월 혁명에 관한 르포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레닌이 서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흥미롭고,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다. 본문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혁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1월 농민대회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II. 서술방식

리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역사의 일부분을 서술한다는 자세로 저술에 임했다. 리드는 각종 개념을 사용하는 역사적 분석을 최소화하고 르포의 맛을 살렸다. 결과적으로 그의 글은 비록 일방의 관점이 짙게 반영되어 있음에도 후대에 소중한 사료가 되었다. 리드는 자신의 직접 체험, 간접 경험, 큰 틀에서의 분석을 버무려 썼다.

리드는 어느 상인 가족 이야기, 만찬 이야기, 보수인사와의 인터뷰, 트로츠키와의 인터뷰, 집회 목격담, 거리에서 관찰하고 체험한 병사 및 노동자들의 언행과 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리드는 자신의 입장을 세울 때 종종 위와 같은 관찰기록을 덧붙여서 주장에 무게를 더했다. 그는 집회에서의 노동자의 발언, 병사의 발언, 농민의 발언, 지도자들의 발언과 그에 대한 청중의 반응까지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는 겨울궁전 습격이 얼마나 무혈혁명에 가까웠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부르주아 언론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으로 둔갑시켰는지도 실감나게 썼다. 그렇게 쓰기 위해서 리드는 주요 사건이 터지는 곳마다 몸소 달려가서 글감을 뚫었다.


III. 혁명에 대한 입장

리드는 혁명에 대한 깊은 경탄과 존경을 표시했다. 그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었으며 볼셰비키의 등장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다”고 썼다. 그의 견지에서, 10월의 봉기는 “고통 받는 민중을 이끌고 역사에 뛰어든, 또 민중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

사르트르, 카뮈, 아버지 없음에 대하여

장-폴 사르트르의 모친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슈바이처 박사의 사촌인 안-마리 슈바이처였고, 부친은 프랑스 해군 장교 장-바티스트 사르트르였다. 장-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장-바티스트는 해외에 주둔중이었고, 귀국하지 못한 채 2년 뒤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사르트르는 훗날 이를 두고 자전소설 "말"에서 아버지가 일찍 죽은 것은 잘 한 일이었다고 평했다. 자신에게 초자아를 부과할 기회를 얻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행복했을까.


알베르 카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아의 몽도비(지금은 드레앙)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스페인 핏줄이었고 문맹이었다. 부친은 알자스 집안의 가난한 농촌노동자였다. 부친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마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1914년 10월 11일에 부상병동에서 사망했다. 카뮈의 극도로 가난한 유년기는 그의 미완성 자전소설 "최초의 인간"에 잘 그려져 있다. 카뮈는 "아버지 없음"에 대해 몹시 민감했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벽이자 자신의 자산으로 삼았다.

카뮈는 행복했을까.

사르트르와 카뮈는 어떤 이들에게는 든든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바이다의 영화 <당통>

바이다(Andrzej Wajda)의 영화 <당통(Danton)>은 1) 로베스피에르를 부정적 인물로 재현하고 당통에게 과도하게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2) 그리고 폴란드의 바웬사를 당통에 대입했다는 이유로 개봉 당시 프랑스 진보지식인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적 혁명사가 중 대가이자 대인배인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는 이 영화가 로베스피에르를 재현한 방식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한 바 없지만, 바이다의 영화에서도 나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바이다의 로베스피에르는 광인이 아니며 환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그는 의연하다. 그는 만인의 행복을 바란다고 믿으며, 인민을 보호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그는 폭력의 해악을 명철하게 자각하고 있다. 또 그는 폭력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곳으로 모으려 한다. 물론 영화에서 피비린내 나는 인물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런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마티에類의 공감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선의를 갖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통치의 역사에서 독특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린 한 정치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공안위원회 집무실에서 우리의 근대성이 태어난 것이다. 작품은 학문적 작업에 독특한 보조제의 역할을 한다. 작품을 그 자체로 환영해야만 한다.”


메모 : 루소는 홉스의 어떤 글을 읽었던가?

루소가 홉스의 글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한 내용은 주로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에 담겨 있다.

그런데 루소가 홉스의 저서 중 <시민론(De cive, 1642)> 외에 다른 글을 읽었다는 증거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며, 루소가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을 읽었으리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출처 : Robin Douglass, Rousseau and Hobbes: Nature, Free Will, and the Passio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p. 191.


퍼거슨(Adam Ferguson)의 정치사상

에든버러대학 도덕철학 교수였던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이 한국에서 마치 18세기 공화주의의 화신인 것처럼 언급되는 것을 가끔 목격하곤 하는데, 퍼거슨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화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그는 당대의 일반적인 상식을 그대로 따라, 민주정이 "최악의 정부형태"라고 단언했다. 또 그는 공화정은 노예 노동에 입각한 고대의 농업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분업과 상업이 널리 침투한 근대사회에서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대국이 공화정을 도입할 경우 순식간에 중우정치의 늪에 빠져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자유는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크게 보아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민주정은 군사정권으로 귀결된다"는 당대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국 헌정이나 고대 및 중세사에 대한 퍼거슨의 세세한 분석에 대한 소개는 생략)


퍼거슨이 내놓은 근대 상업사회용 맞춤형 대안은, 지금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시민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적 귀족(특권계급)"을 형성해서 "혈통의 귀족" 및 "부의 귀족"에 맞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 사람들이 혈통과 돈만 존경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로도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능력주의"의 사다리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군사귀족이 기존의 정치계급의 권력독점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메모 : 데리다, <인간의 종말>

발췌 - 자크 데리다, '인간의 종말(Les fins de l’homme)'

佛文 145:1~147:0

이제 우리는 현상(phainesthai)의 사유를 목적(telos)의 사유에 연결하는 필연성을 이해하게 됐다. 동일한 통로를 통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지배하는 목적론(téléologie)을 읽을 수 있다.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인류/인간성(humanité)”은 여전히 그것을 향해 초월론적 목적(telos)이 자신을 알리는 존재의 이름이다. 이 때 초월론적 목적(telos)은 칸트적 의미의 이념(Idée)으로, 또는 심지어 이성(Raison)으로 규정된다. 목적론적 이성의 전개, 다시 말해 역사가 전개될 장소를 지정하는 것은 가장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설에서도 이성은 곧 역사며, 역사는 오직 이성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이성은 “모든 인간에서, 아무리 원시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성적 인간인 모든 인간에서 작동한다.” 모든 종류의 인류/인간성과 인간적 사회성은 “인간적 보편성의 본질적 요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성을 관통하며 가로지르는 목적론적 이성이 이 뿌리 안에서 자신을 알린다. 이와 함께 독자적인 문제제기(또는 일단의 문제들)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의 전체성과 관계하며, 최종적으로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전체의미와 관계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인류/인간성을 가로지르는 이성의 목적론의 궁극적 실현이다. 따라서 후설이 필요할 때마다 현상학적 표지(indice)나 괄호(guillemets)로 영향을 미치면서 소생시키고 복원시킨,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의 권위 하에서, 경험론적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초월론적 인간주의를 단언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후설의 추론에서 본질적 자원을 형성하는 이 형이상학 개념들 중에서, 종말(fin)과 목적(telos)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상학의 모든 단계에서, 또 특히 “칸트적 의미의 이념”에 의지…

메모 : 존 로크의 <통치론>과 사회계약론

1660년, 1667년, 1676년에도 (어떠한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존 로크(John Locke)는 명예혁명 이전에 입장을 완전히 바꿔서 자기가 속해 있던 샤프츠베리 당파에 유리하게 <통치론>을 저술했다.


이 책은 1683년경에 분량 대부분이 집필되어 있었으며, 추가 수정을 거치고 분량을 절반 이상 압축해서 명예혁명 이후인 1689년에 출판되었다. 로크는 이 저서에서 신의 뜻과 자연법에 토대를 두고 신체권, 소유권, 저항권을 규정했고, 이것들을 기둥으로 삼아 사회계약론적 통치 이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로크는 자연법의 기초에 대한 논증을 생략하고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으로 자연법을 느낄 수 있다고만 썼는데, 이것은 당시 커다란 허점으로 인식되어 많은 논객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로크도 자신이 <통치론>의 이 토대를 정교하게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느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가 언젠가는 이것을 정식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존 던(John Dunn)의 해석을 요약한 것이다. 추가로, 로크의 <통치론>은 그의 종교관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읽어야만 하며, 쉽사리 현대 자유주의의 기원으로서 호출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통치론의 원제: Two Treatises of Government: In the Former, The False Principles, and Foundation of Sir Robert Filmer, and His Followers, Are Detected and Overthrown. The Latter Is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

서울 바깥에도 세상이 있다. 지방은 어디로 가는가

지방 (혹은 지역) 문제는 주목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전라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게 다가 아니다.
대구는 폐허다. 시간이 멈춘 도시.
부산은? 겨우 숨이 붙어 있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은 점차 수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어간다.
창원, 거제는? 그나마 살아 있었는데 허물어져간다.

이건 그나마 도시 이야기다.

시골로 들어가면 더 말할 수조차 없다.
호남은 말할 것도 없다. 경기도, 경북, 강원도, 서부 경남은?

지금 농촌은 더 이상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로는 조금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도시로 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은 서울에 기생하고, 서울과 함께 웃고 울며,
수도권 바깥의 지방 도시들은 생명줄이 끊겨서
남은 산소로 천천히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서울에 있다.
서울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또는 앞으로의 터전이 확고하게 서울인 사람들은, 한국 바깥의 세계는 보되 서울 바깥의 한국은 보지 못한다.

서구에서 "국민경제"가 탄생한지 300년,
서울 바깥에는 서울의 작고 못난 복사판만이 남는다.

획일화된 간판들, 그 골목 뒷편에는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짝이 달린 가게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지방은 이제 서울에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블로그 먹방에 의존하는 "지역 맛집"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이것은 결코, 결코 지속 가능한 미래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 오건 말건
우리는 지방을 살려야 한다.
지방의 도시가 살고 농촌이 살면 나라의 근본이 고루 펴진다.
서울과 IT와 화려한 국제화는 텅 비어가는 국토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없고

결국 희망찬 마음을 가진 인간이 없는 땅에서
서울을 향해 달리는 KTX만이 시간을 가르는
SF만화가 현실이 될 것이다.

굳이 핵전쟁이 없어도.
이미 서울 바깥은 사라지고 있다.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다. 그러나 파리 바깥에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프랑스가 있다.
런던은…

형식주의적 정치 평론에 반대한다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찻잔 속의 태풍을 "파쇼"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일단 파시즘이 뭔지 성실하게 고찰하지 않은 채 던지는 혐오와 증오의 분풀이에 가깝고, 백번 양보해서 진지한 분석으로서 받아주더라도 형식주의적 분석에 머무른다.

현대 정치에서 형식주의적 분석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냉전기 아렌트(Hannah Arendt)를 위시한 미국 학자들이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개념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전체주의 논쟁에서 드러난 바 있듯이, 형식주의적 분석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편 가르기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민주정치의 본질에 대한 성실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