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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 성의 역사 1~4권 완간

[ 푸코 - 성의 역사 1~4권 완간 ]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L’Histoire de la sexualité)>는 현재까지 총 4권으로 구성되는데, 1권 <지식의 의지(La volonté de savoir)>는 1976년, 2권 <쾌락의 활용(L’usage des plaisirs)>과 3권 <자기에의 배려(Le souci de soi)>는 사망 직전인 1984년, 4권 <육체의 고백(Les aveux de la chair)>은 2018년에 출간됐다. 제1권에서 푸코는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를 위시한 일련의 저자들이 제시한 “억압 가설,” 즉 근대 서구사회가 성을 억눌러왔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성과 권력의 문제를 새로이 역사화하고자 했다. 제2권부터 그는 처음의 6부작 계획을 폐기하고 새로운 접근법과 구성에 따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자기조절ㆍ자기관리 기술을 ‘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천착했다. 따라서 2권과 3권은 차라리 ‘새로운 성의 역사’의 1권과 2권이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후출판금지”를 명시적으로 지시한 푸코의 뜻에 따라 공개되지 않고 있던 제4권의 수고가 2013년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으며, 유족의 결정에 따라 2018년에 단행본으로 제4권이 출간됐다. 그러나 각 권의 “진정한” 순서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명확하지 않다. 푸코는 <육체의 고백>이 제3권이 될 것이며 <자기에의 배려>는 아예 <성의 역사> 시리즈의 일부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쾌락의 활용>과 <자기에의 배려>가 합본단권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서론이 있는 2권과 서론이 없는 3권으로 분리되어 동시출간된 두 권의 책에는 원래 한 권이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게다가 푸코가 4권이 된 초기 기독교 연구의 원고를 1979~1980년에 집필한 뒤에야 2권과 3권의 작업에 돌입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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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TV/설민석)>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선을 넘는 녀석들>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김대보  한국교원대  “왕과 귀족은 평민이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찬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모을 국민의회를 결성했고, 성난 시민들은 왕권유지를 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습격했다.1) 그리고 이 습격사건은 최초의 민주화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전 세계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바스티유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은 그곳에 정치범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민중들에 의해 영웅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4년 후, 절대권력이던 루이 16세는 시민들 손에 이끌려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완성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유죄가 되기 전에 왕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과거의 치욕을 복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치욕은 루이르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를 지나가던 루이 16세 앞에서 학생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가 무릎을 꿇고 시를 읊었지만, 루이 16세가 시큰둥하게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통하지 않은 왕의 말로가 비참했다. 이제 민중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국민에 의한 국민공회가 만들어졌고, 3인방(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이 주도했다. 민중들은 혁명이 오면 신세계가 올 줄 알았는데, 이 세 사람이 독재를 시작했다. 여기서 마라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몇 달 안에 십만 명만 죽이게 해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라를 죽인 사람이 코르데인데, 심문 과정에서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답했다. 코르데는 공포정에 맞섰던 암살천사였다. 당시 사람들이 코르데의 미모를 보고 반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라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도 암살당할 수도 있다면서 더 무섭게 독재를 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사

Histoire de l'établissement du christianisme (1776-1777) de Voltaire (chapitres 22-26)

Chapitres 22 à 26 de l' Histoire de l'établissement du christianisme  (1776-1777) de Voltaire , où le vieux patriarche de Ferney propose une société des théistes. Chapitre XXII. En quoi le christianisme pouvait être utile Nulle secte, nulle école, ne peut être utile que par ses dogmes purement philosophiques car les hommes en seront-ils meilleurs quand Dieu aura un verbe, ou quand il en aura deux, ou quand il n’en aura point ? Qu’importe au bonheur de la société que Dieu se soit incarné quinze fois vers le Gange, ou cent cinquante fois à Siam, ou une fois dans Jérusalem ? Les hommes ne pouvaient rien faire de mieux que d’admettre une religion qui ressemblât au meilleur gouvernement politique. Or ce meilleur gouvernement humain consiste dans la juste distribution des récompenses et des peines ; telle devait donc être la religion la plus raisonnable. Soyez juste, vous serez favori de Dieu ; soyez injuste, vous serez puni. C’est la grande loi dans toutes les sociétés

유럽 문서고 탐방 #1 - 프랑스 이제르 도립사고 + 국립사고(Archives nationales de France) - 김대보

유럽 문서고 탐방 #1 프랑스 이제르 도립사고 + 국립사고(Archives nationales de France) 김대보 파리1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르노블이라는 프랑스 동남부의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그곳에서 무심코 찾아간 한 공공기관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 기관은 이제르 도립 문서보관소(Les Archives départementales de l’Isère)였다. 그곳은 분명 이제르 도 행정 혹은 국가 행정과 관련된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공공기관이었지만, 어학연수를 받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가면서 느낀 것은 문서보관소라는 곳이 도서관 같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국가기록원을 비롯하여 공공기관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물 보관소, 혹은 문서보관소라고 불리는 기관의 이미지는 이 때 모두 생겼다.  파리1대학에 입학한 후, ‘역사학도라면 응당 문서보관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만 가지고 파리에 있는 국립 문서보관소(한국의 국가기록원에 해당)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르노블에서 프랑스의 문서보관소를 살짝 느껴봤기 때문에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하게 찾아간 셈이다.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문서를 어떻게 신청하는지, 등록은 어디서 하는지, 나한테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등 정말 중요한 정보들을 하나도 모른 채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찾아간 것이다.  프랑스 국립 문서보관소에 처음 등록을 한 것은 파리1대학의 정식 학생증이 나온 직후인 2011년 1월이었다. 인터넷에서 ‘Les Archives nationales’이라고 검색하고, 모든 항목을 다 뒤져서 간신히 가등록(préinscription)을 했다. 물론 이 때 두 상자를 예약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이 두 상자를 참고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Archives, 즉 복수형으로 써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정말 말 다 했다. 이렇게 가등록

극중도(l'extrême centre) 개념

" 극중도(l'extrême centre) "는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혁명사강좌주임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 교수가 2005년에 낸 책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라자르 카르노를 비롯해 현 프랑스의 "기술관료지배"를 만들어낸 1789-1830년 혁명세대의 몇 가지 사상적 조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카르노, 콩스탕, 레알, 당글라,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밖에 수십 수백의 추종자를 거느린 이념이자 입장으로서, 극중도는 왕당파도, 완고한 보수주의도, 급진적 민주주의도 거부하고, 국가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길러낸 초엘리트가 인민을 계도하고 인민에게 봉사하되 인민의 통치를 결코 받지 않는 정치를 가리킨다. 극중도의 이념은 온건한 개혁을 통한 단선적이면서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법률과 행정을 통한" 진보를 추구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의회와 토론이 아닌 행정부와 실행력이 전진의 동력이다. 그래서 극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모든 준동을 때에 따라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국가폭력으로 찍어누르고 엘리트가 규정한 부국강병 및 점진적인 인류진보의 전망에 따라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며, 세르나의 표현으로는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이념과 논의도 허용하지 않는" 국가이념이다.  따라서 버크식 보수주의나 로베스피에르식 진보주의의 프레임으로는 극중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을 바꾸는 팔랑개비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 뿐이다. 극중도는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세르나가 볼 때 20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를 지배한 국가사상의 근간이다. (세르나는 감정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극중도에게 탄압 당하고 유배가야했던 민주파에 가장 크게 공감하면서도 이 책에서 놀라울 만큼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준다.)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 마티아스 미델(Matthias Middell)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마티아스 미델 이 글의 목적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지의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연구는 축소되었다. 게다가 이 ‘나머지 유럽’의 연구에는 어떤 동질성도 없다. 또 주변부가 흔히 그렇듯이, 이 ‘나머지’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불명확하며,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학회나 주제별 학술지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1960년 스톡홀름과 1990년 마드리드의 세계학술대회 사이에 이 ‘나머지 유럽’은 많은 혁명사가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가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구심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les Daline, Lesnodorski, Mejdricka, Benda, Töennesson, Markov, Galanta Garrone, Saitta 등)이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운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은 파머(Robert Palmer)와 소불의 작업에서 공통언어를 발견했다. 이 유럽의 ‘학파’ 외에도 혁명사 연구자로 호주의 루데, 일본의 타카하시, 중국의 장지량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진 소불―퓌레 논쟁의 결과로 1960년대 말부터 혁명의 사회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혁명정치를 사회적 조건으로써 설명했으며, 하층민 연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루데, history from below)’에 초점을 맞추었다.(소불의 상퀼로트 연구와 르페브르, 아도, 달린, 타카하시의 농민 연구) 그러나 다수는 정치사에 몰두했다.(혁명력 3년 상퀼로트의 패배, 혁명군 등) 네 권짜리 자크 루(Jacques Roux) 전기를 쓴 동독의 마르코프처럼 한 인물에 집중하는 사가도 있었다. 자기비판은 나중에 나타났다. 마르코프는 일단의 역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프랑스혁명 은 부르주아혁명 이 아니었는가? - 역사서술의 유산 - 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

Daniel Bensaïd, <혁명들: 위대하고 정지해있고 침묵하는> 요약-번역

<혁명들: 위대하고 정지해있고 침묵하는> 요약-번역 다니엘 벵사이드 Daniel Bensaïd, " Revolutions: Great and Still and Silent ,"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 I > <노선( Lignes )>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