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김민철(이화여대 사학과 강사)
I.

이 글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50세에 출간한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1)을 저술함으로써 18세기의 맥락에서 어떤 언어적 ‘행위’를 한 것인지를 개략적으로 밝히는 짧은 안내서로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인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만큼 필자 또한 당시의 관행을 따라 루소처럼 그 둘을 구분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논평처럼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민주주의의 역설”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2) 루소가 그러한 구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견해를 제출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역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필자는 이 짤막한 글을 통해 루소를 “직접민주주의의 옹호자로”3) 간주하는 독법이나 “그가 유토피아적이고 윤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비전으로 가지고 있었”다고4) 보는 해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회계약론>을 “역사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사회계약론>이 18세기 유럽에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중요한 책도 아니었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이른바 “사상의 사회사”를 주창한 신(新)문화사가들 중에서도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이 이런 주장을 가장 소리 높여 내세웠는데, 그 근거는 <사회계약론>의 판매량이 당시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나 <신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 등 루소의 다른 저작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먼 버로우즈(Simon Burrows)의 후속 연구는 <사회계약론>이 해적판, 요약본 등 비공식적 판로를 통해 널리 유통되었음을 밝혀냈다. 당대에 애덤 스미스는 <사회계약론>이 루소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줄 것이라 예언했고, 볼테르는 <사회계약론>…
최근 글

Histoire de l'établissement du christianisme (1776-1777) de Voltaire (chapitres 22-26)

Chapitres 22 à 26 de l'Histoire de l'établissement du christianisme (1776-1777) deVoltaire, où le vieux patriarche de Ferney propose une société des théistes.


Chapitre XXII. En quoi le christianisme pouvait être utile
Nulle secte, nulle école, ne peut être utile que par ses dogmes purement philosophiques car les hommes en seront-ils meilleurs quand Dieu aura un verbe, ou quand il en aura deux, ou quand il n’en aura point ? Qu’importe au bonheur de la société que Dieu se soit incarné quinze fois vers le Gange, ou cent cinquante fois à Siam, ou une fois dans Jérusalem ?

Les hommes ne pouvaient rien faire de mieux que d’admettre une religion qui ressemblât au meilleur gouvernement politique. Or ce meilleur gouvernement humain consiste dans la juste distribution des récompenses et des peines ; telle devait donc être la religion la plus raisonnable.

Soyez juste, vous serez favori de Dieu ; soyez injuste, vous serez puni. C’est la grande loi dans toutes les sociétés qui ne sont pas a…

유럽 문서고 탐방 #1 - 프랑스 이제르 도립사고 + 국립사고(Archives nationales de France) - 김대보

유럽 문서고 탐방 #1
프랑스 이제르 도립사고 + 국립사고(Archives nationales de France)
김대보

파리1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르노블이라는 프랑스 동남부의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그곳에서 무심코 찾아간 한 공공기관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 기관은 이제르 도립 문서보관소(Les Archives départementales de l’Isère)였다. 그곳은 분명 이제르 도 행정 혹은 국가 행정과 관련된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공공기관이었지만, 어학연수를 받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가면서 느낀 것은 문서보관소라는 곳이 도서관 같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국가기록원을 비롯하여 공공기관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물 보관소, 혹은 문서보관소라고 불리는 기관의 이미지는 이 때 모두 생겼다. 
파리1대학에 입학한 후, ‘역사학도라면 응당 문서보관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만 가지고 파리에 있는 국립 문서보관소(한국의 국가기록원에 해당)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르노블에서 프랑스의 문서보관소를 살짝 느껴봤기 때문에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하게 찾아간 셈이다.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문서를 어떻게 신청하는지, 등록은 어디서 하는지, 나한테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등 정말 중요한 정보들을 하나도 모른 채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찾아간 것이다. 

프랑스 국립 문서보관소에 처음 등록을 한 것은 파리1대학의 정식 학생증이 나온 직후인 2011년 1월이었다. 인터넷에서 ‘Les Archives nationales’이라고 검색하고, 모든 항목을 다 뒤져서 간신히 가등록(préinscription)을 했다. 물론 이 때 두 상자를 예약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이 두 상자를 참고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Archives, 즉 복수형으로 써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정말 말 다 했다. 이렇게 가등록을 하고 내가 지정한 날짜에 처음으로! 국립 문서보…

극중도(l'extrême centre) 개념

"극중도(l'extrême centre)"는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혁명사강좌주임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 교수가 2005년에 낸 책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라자르 카르노를 비롯해 현 프랑스의 "기술관료지배"를 만들어낸 1789-1830년 혁명세대의 몇 가지 사상적 조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카르노, 콩스탕, 레알, 당글라,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밖에 수십 수백의 추종자를 거느린 이념이자 입장으로서, 극중도는 왕당파도, 완고한 보수주의도, 급진적 민주주의도 거부하고, 국가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길러낸 초엘리트가 인민을 계도하고 인민에게 봉사하되 인민의 통치를 결코 받지 않는 정치를 가리킨다.
극중도의 이념은 온건한 개혁을 통한 단선적이면서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법률과 행정을 통한" 진보를 추구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의회와 토론이 아닌 행정부와 실행력이 전진의 동력이다. 그래서 극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모든 준동을 때에 따라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국가폭력으로 찍어누르고 엘리트가 규정한 부국강병 및 점진적인 인류진보의 전망에 따라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며, 세르나의 표현으로는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이념과 논의도 허용하지 않는" 국가이념이다. 
따라서 버크식 보수주의나 로베스피에르식 진보주의의 프레임으로는 극중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을 바꾸는 팔랑개비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 뿐이다. 극중도는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세르나가 볼 때 20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를 지배한 국가사상의 근간이다.
(세르나는 감정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극중도에게 탄압 당하고 유배가야했던 민주파에 가장 크게 공감하면서도 이 책에서 놀라울 만큼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준다.)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 마티아스 미델(Matthias Middell)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마티아스 미델
이 글의 목적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지의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연구는 축소되었다. 게다가 이 ‘나머지 유럽’의 연구에는 어떤 동질성도 없다. 또 주변부가 흔히 그렇듯이, 이 ‘나머지’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불명확하며,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학회나 주제별 학술지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1960년 스톡홀름과 1990년 마드리드의 세계학술대회 사이에 이 ‘나머지 유럽’은 많은 혁명사가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가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구심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les Daline, Lesnodorski, Mejdricka, Benda, Töennesson, Markov, Galanta Garrone, Saitta 등)이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운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은 파머(Robert Palmer)와 소불의 작업에서 공통언어를 발견했다. 이 유럽의 ‘학파’ 외에도 혁명사 연구자로 호주의 루데, 일본의 타카하시, 중국의 장지량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진 소불―퓌레 논쟁의 결과로 1960년대 말부터 혁명의 사회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혁명정치를 사회적 조건으로써 설명했으며, 하층민 연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루데, history from below)’에 초점을 맞추었다.(소불의 상퀼로트 연구와 르페브르, 아도, 달린, 타카하시의 농민 연구) 그러나 다수는 정치사에 몰두했다.(혁명력 3년 상퀼로트의 패배, 혁명군 등) 네 권짜리 자크 루(Jacques Roux) 전기를 쓴 동독의 마르코프처럼 한 인물에 집중하는 사가도 있었다.



자기비판은 나중에 나타났다. 마르코프는 일단의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