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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다의 영화 <당통>

바이다(Andrzej Wajda)의 영화 <당통(Danton)>은 1) 로베스피에르를 부정적 인물로 재현하고 당통에게 과도하게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2) 그리고 폴란드의 바웬사를 당통에 대입했다는 이유로 개봉 당시 프랑스 진보지식인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적 혁명사가 중 대가이자 대인배인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는 이 영화가 로베스피에르를 재현한 방식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한 바 없지만, 바이다의 영화에서도 나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바이다의 로베스피에르는 광인이 아니며 환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그는 의연하다. 그는 만인의 행복을 바란다고 믿으며, 인민을 보호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그는 폭력의 해악을 명철하게 자각하고 있다. 또 그는 폭력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곳으로 모으려 한다. 물론 영화에서 피비린내 나는 인물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런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마티에類의 공감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선의를 갖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통치의 역사에서 독특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린 한 정치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공안위원회 집무실에서 우리의 근대성이 태어난 것이다. 작품은 학문적 작업에 독특한 보조제의 역할을 한다. 작품을 그 자체로 환영해야만 한다.”


최근 글

메모 : 루소는 홉스의 어떤 글을 읽었던가?

루소가 홉스의 글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한 내용은 주로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에 담겨 있다.

그런데 루소가 홉스의 저서 중 <시민론(De cive, 1642)> 외에 다른 글을 읽었다는 증거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며, 루소가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을 읽었으리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출처 : Robin Douglass, Rousseau and Hobbes: Nature, Free Will, and the Passio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p. 191.


퍼거슨(Adam Ferguson)의 정치사상

에든버러대학 도덕철학 교수였던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이 한국에서 마치 18세기 공화주의의 화신인 것처럼 언급되는 것을 가끔 목격하곤 하는데, 퍼거슨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화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그는 당대의 일반적인 상식을 그대로 따라, 민주정이 "최악의 정부형태"라고 단언했다. 또 그는 공화정은 노예 노동에 입각한 고대의 농업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분업과 상업이 널리 침투한 근대사회에서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대국이 공화정을 도입할 경우 순식간에 중우정치의 늪에 빠져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자유는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크게 보아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민주정은 군사정권으로 귀결된다"는 당대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국 헌정이나 고대 및 중세사에 대한 퍼거슨의 세세한 분석에 대한 소개는 생략)


퍼거슨이 내놓은 근대 상업사회용 맞춤형 대안은, 지금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시민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적 귀족(특권계급)"을 형성해서 "혈통의 귀족" 및 "부의 귀족"에 맞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 사람들이 혈통과 돈만 존경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로도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능력주의"의 사다리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군사귀족이 기존의 정치계급의 권력독점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메모 : 데리다, <인간의 종말>

발췌 - 자크 데리다, '인간의 종말(Les fins de l’homme)'

佛文 145:1~147:0

이제 우리는 현상(phainesthai)의 사유를 목적(telos)의 사유에 연결하는 필연성을 이해하게 됐다. 동일한 통로를 통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지배하는 목적론(téléologie)을 읽을 수 있다.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인류/인간성(humanité)”은 여전히 그것을 향해 초월론적 목적(telos)이 자신을 알리는 존재의 이름이다. 이 때 초월론적 목적(telos)은 칸트적 의미의 이념(Idée)으로, 또는 심지어 이성(Raison)으로 규정된다. 목적론적 이성의 전개, 다시 말해 역사가 전개될 장소를 지정하는 것은 가장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설에서도 이성은 곧 역사며, 역사는 오직 이성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이성은 “모든 인간에서, 아무리 원시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성적 인간인 모든 인간에서 작동한다.” 모든 종류의 인류/인간성과 인간적 사회성은 “인간적 보편성의 본질적 요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성을 관통하며 가로지르는 목적론적 이성이 이 뿌리 안에서 자신을 알린다. 이와 함께 독자적인 문제제기(또는 일단의 문제들)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의 전체성과 관계하며, 최종적으로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전체의미와 관계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인류/인간성을 가로지르는 이성의 목적론의 궁극적 실현이다. 따라서 후설이 필요할 때마다 현상학적 표지(indice)나 괄호(guillemets)로 영향을 미치면서 소생시키고 복원시킨,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의 권위 하에서, 경험론적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초월론적 인간주의를 단언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후설의 추론에서 본질적 자원을 형성하는 이 형이상학 개념들 중에서, 종말(fin)과 목적(telos)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상학의 모든 단계에서, 또 특히 “칸트적 의미의 이념”에 의지…

메모 : 존 로크의 <통치론>과 사회계약론

1660년, 1667년, 1676년에도 (어떠한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존 로크(John Locke)는 명예혁명 이전에 입장을 완전히 바꿔서 자기가 속해 있던 샤프츠베리 당파에 유리하게 <통치론>을 저술했다.


이 책은 1683년경에 분량 대부분이 집필되어 있었으며, 추가 수정을 거치고 분량을 절반 이상 압축해서 명예혁명 이후인 1689년에 출판되었다. 로크는 이 저서에서 신의 뜻과 자연법에 토대를 두고 신체권, 소유권, 저항권을 규정했고, 이것들을 기둥으로 삼아 사회계약론적 통치 이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로크는 자연법의 기초에 대한 논증을 생략하고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으로 자연법을 느낄 수 있다고만 썼는데, 이것은 당시 커다란 허점으로 인식되어 많은 논객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로크도 자신이 <통치론>의 이 토대를 정교하게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느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가 언젠가는 이것을 정식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존 던(John Dunn)의 해석을 요약한 것이다. 추가로, 로크의 <통치론>은 그의 종교관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읽어야만 하며, 쉽사리 현대 자유주의의 기원으로서 호출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통치론의 원제: Two Treatises of Government: In the Former, The False Principles, and Foundation of Sir Robert Filmer, and His Followers, Are Detected and Overthrown. The Latter Is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

서울 바깥에도 세상이 있다. 지방은 어디로 가는가

지방 (혹은 지역) 문제는 주목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전라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게 다가 아니다.
대구는 폐허다. 시간이 멈춘 도시.
부산은? 겨우 숨이 붙어 있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은 점차 수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어간다.
창원, 거제는? 그나마 살아 있었는데 허물어져간다.

이건 그나마 도시 이야기다.

시골로 들어가면 더 말할 수조차 없다.
호남은 말할 것도 없다. 경기도, 경북, 강원도, 서부 경남은?

지금 농촌은 더 이상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로는 조금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도시로 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은 서울에 기생하고, 서울과 함께 웃고 울며,
수도권 바깥의 지방 도시들은 생명줄이 끊겨서
남은 산소로 천천히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서울에 있다.
서울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또는 앞으로의 터전이 확고하게 서울인 사람들은, 한국 바깥의 세계는 보되 서울 바깥의 한국은 보지 못한다.

서구에서 "국민경제"가 탄생한지 300년,
서울 바깥에는 서울의 작고 못난 복사판만이 남는다.

획일화된 간판들, 그 골목 뒷편에는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짝이 달린 가게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지방은 이제 서울에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블로그 먹방에 의존하는 "지역 맛집"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이것은 결코, 결코 지속 가능한 미래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 오건 말건
우리는 지방을 살려야 한다.
지방의 도시가 살고 농촌이 살면 나라의 근본이 고루 펴진다.
서울과 IT와 화려한 국제화는 텅 비어가는 국토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없고

결국 희망찬 마음을 가진 인간이 없는 땅에서
서울을 향해 달리는 KTX만이 시간을 가르는
SF만화가 현실이 될 것이다.

굳이 핵전쟁이 없어도.
이미 서울 바깥은 사라지고 있다.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다. 그러나 파리 바깥에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프랑스가 있다.
런던은…

형식주의적 정치 평론에 반대한다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찻잔 속의 태풍을 "파쇼"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일단 파시즘이 뭔지 성실하게 고찰하지 않은 채 던지는 혐오와 증오의 분풀이에 가깝고, 백번 양보해서 진지한 분석으로서 받아주더라도 형식주의적 분석에 머무른다.

현대 정치에서 형식주의적 분석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냉전기 아렌트(Hannah Arendt)를 위시한 미국 학자들이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개념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전체주의 논쟁에서 드러난 바 있듯이, 형식주의적 분석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편 가르기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민주정치의 본질에 대한 성실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메모 : 들뢰즈 & 가타리 - 국가과학과 유목과학

국가과학유목과학은 서로 형식화 양식이 다르다. 그러나 前者는 자신의 주권형식을 後者의 발명에 계속 강요해왔다. 前者는 後者로부터 자신이 전유할 수 있는 것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非과학’으로 치부해버렸다.

국가과학은 전쟁기계의 모든 차원을 시민적인 계량 규칙에 종속시킴으로써 유목과학의 적용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해 이를 관리하고 국지화시켜, 사회 전체에 그 영향력이 전파되지 않도록 한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의 사유와 입장은 국가과학에 의해 제약되고 훈육되고 나서야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개념을 억압당한 뒤에야) 비로소 활용되기 시작했다.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보다 한층 더 크고 높게 교회를 지으려는 의지와 분리할 수 없다. 더 멀리, 더 하늘 높이... 이 두 양식 간의 차이는 단순히 양적인 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를 테면 로마네스크 양식이 홈이 패인 공간 속에 머물러 있는 반면 고딕 양식은 매끈한 공간을 정복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국가에 속하는 대규모 집단들은 분화되고 계서제적인 유기조직으로서 어떤 권력/기능을 독점하는 동시에 국가의 여기저기에 대표자를 배치한다. 이들은 가족 모델과 국가 모델을 하나로 통합시켜 그들 자신도 “대가족”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이 도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작동한다. 가령 “로비”는 윤곽이 유동적으로 변하는 집단으로서 국가와 전쟁기계 사이에서 극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G. Deleuze & F. Guattari,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역, 694~702쪽.

(제대로 이해하고 요약한 것이 결코 아님)

프랑스혁명기 한 국회의원의 "좋은 국민"과 "나쁜 국민" 구분

쿠르투아(Edme-Bonaventure Courtois)는 열월 이전에는 산악파였던 국회의원으로서, 로베스피에르의 문서들에 대한 1795년 1월 의회 보고서에서 그를 악마처럼 형상화한 바 있다.

총재정부 수립 후, 한 소책자에서 그는 인민을 "잃을 것이 있는" 그의 인민과 "잃을 것이 없는" 저들의 인민으로 나눴다.

1796년 소책자에서 그는 그의 "선량한" 인민을 "근면하고 부지런하며 성찰할 줄 아는 계급들, 커다란 벌집에서 공동의 선을 위해 종일 일하느라 너무 지쳐서 악한 생각을 할 틈도 없는 이 활발한 벌들"로 정의함으로써 저들의 "불량한" 인민, 즉 "진흙탕에서 나와 대기 중에 소용돌이치는 벌레들 같은 … 저 불안하고 소란스러운 종자들, 혁명의 폭풍에서 자극제를 얻는 분자들"과 구분했다.


쿠르투아와 그 밖의 많은 당대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의 대표적 형상은 바로 이처럼 무지하고 통제 불가능한 불한당들의 통치였다.

사료 출처 : Edme-Bonaventure Courtois, Réponse aux détracteurs du 9 thermidor l'an II (Paris, 1796), BNF LB41-3978

"언론은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암흑시대에 돌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디언)

"서양에서 광고비로 집행되는 금액 전체의 90%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집을 구하기 위해 신문의 광고란을 펼쳐보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 요즘들어 부쩍이나 접속할 때마다 후원금을 달라고 사정하는 유명 정론지 가디언(The Guardian)에서 내놓은 (특유의 길고, 깊고, 설득력 있는) 칼럼의 결론 :

1. 기존 대형 언론의 몰락은 사실상 확실하며 구글, 페이스북, 위챗 같은 플랫폼들이 인기 있는 기자들의 기사가 실제로 돈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 앞으로 뉴스 시장을 지배할 것이다.

2. 언론의 공공성 유지를 위해 정부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3. 전문 언론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민들이 마치 기자처럼 사회의 눈과 목소리의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책임 있는 뉴스 소비자 및 후원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좋은 시민의 의무이기도 하다.

원문 : https://www.theguardian.com/media/2017/apr/15/journalism-faces-a-crisis-worldwide-we-might-be-entering-a-new-dark-age


Comment on the video "Live-Animal Eating Exposed" uploaded by PETA

PETA uploaded a video provocatively titled "Live-Animal Eating Exposed." (link to the video : https://www.youtube.com/watch?v=Gss7lQEfecQ) This video sends out the message that eating an octopus alive is immoral. That's why it uses the word "exposed." Many of the comments to the video show that quite a lot of people find it disgusting even though they eat meat in their everyday lives.

This inconsistency is disgusting. I don't mean eating an octopus alive is disgusting. I mean meat-eating people thinking eating an octopus alive is disgusting is disgusting. If a vegetarian or a vegan said that, I would of course understand because that is an authentic and consistent view.

Most animals eat other animals alive. That is the way of the nature.

You may decide to live extraordinarily morally by going vegan. That's super fine. I actually think it's great. But as long as you are a carnivore, you not eating animals alive does not at all necessarily mean that t…

프랑스혁명과 역사의 진동 : 촛불과 박근혜

시인 워즈워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두고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리고 이 날 젊은이로 살아있다는 것은 천국과도 같은 것이다!" 라고 외쳤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좌절하고 철저한 반동적 보수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낭만주의자들이 프랑스혁명의 "실패"를 보고 좌절했고 정치에서 마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몇십년 뒤 정치가 되살아났다. 바이런은 그리스의 독립을 외치며 죽었고 파리의 학생, 노동자, 부르주아는 단결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싸웠고, 목숨을 던져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렸다. 이탈리아에서는 젊은 개혁가들이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불법적인 운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1830년, 프랑스에 7월 왕정이 들어섰다.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지는 혁명 동지였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고, 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부르주아 정권을 수립했다. 이 정권은 1848년 다시 한 번 혁명을 겪을 때까지 18년을 갈 것이었다.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이른바 "정통 왕당파" 세력은 몰락한 듯 보였으나 3년만에 부활하여 의회에서 정치적 세력을 회복하고 활개쳤다. 사람들이 이들에게 표를 주는 것을 보고 또 수많은 개혁적 낭만주의자들은 좌절하고 정치를 혐오하고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부르주아 왕정을 무너뜨렸으되 부르주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6월의 노동자 혁명은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거쳐 스러져갔고,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황제가 되었으며, 자유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혼합 시행했으나 멍청한 판단으로 전쟁을 일으키자마자 프로이센 군에 포로로 잡혔다. 곧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파리 코뮌을 가차 없이 학살했고 민주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체제였다.

낭만주의자들은 19세기 내내 혁명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헛되이 부르주아 지배의 권위주의 …

계몽시대의 언론, 자유와 질서 : 포스콜로의 견해

18세기 "계몽의 시대" 유럽에서 정치적 언론이 떠오르면서,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순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자유롭게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과 언론이 중상모략에 가담하여 불필요하게 여론을 호도하거나 군주의 통치를 방해할 수 있으므로 검열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혁명 이전에는 언제나 검열이 존재했고, 1790년대 프랑스혁명기에는 국가의 언론정책이 이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의 편을 번갈아 들어주며 오락가락했다.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럽 각국에서 이 문제는 중요한 화두였다.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운동의 핵심 지식인 중 하나였던 우고 포스콜로(Ugo Foscolo)는 이것이 익명 기사와 필명 또는 이니셜로 서명된 기사가 주를 이루는 당시 상황에서 기인하는 면이 크다고 봤다. 한편으로는 언론이 권력의 재갈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당당하게 서명된 기사가 드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기사에 대해 기자 개인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여론을 호도하거나 부정확하거나 기타 사회적 부작용을 일으키기 쉬운 기사가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스콜로는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을 모두 폐지하는 대신 기자들이 기사에 모두 실명으로 서명하게 만들면, 잘못된 기사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 교정될 것이고, 명백한 명예훼손은 사후에 법정에서 다투면 되므로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이라 주장했다.

(당시 언론의 자유와 검열폐지를 지지하는 것은 강경 급진파로 분류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주장이었고, 소위 온건중도파의 주장은 대개 언론을 정부가 어느 정도 검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