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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프랑스혁명부르주아혁명이 아니었는가?
- 역사서술의 유산 -


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Félix Ponteil)의 1968년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퐁테유는 “부르주아지가 1789년을 만들었다. 그들은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갈망했는데, 후자는 1789년에 획득했고, 전자는 제1제정기에 얻었다”고 썼다.

‘정통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이라는 용어가 상정하는 명확한 단절은 냉전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이 끝났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냉전이 끝난 것은 분명하다. 1990년에 홉스봄(Eric Hobsbawm)은 르페브르가 1932년에 쓴 글을 자칭 ‘수정주의’ 사가들의 작업을 상대화하기 위해서 인용했다. 르페브르는 성숙에 이른 부르주아지의 힘이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로 혁명이 부르주아지의 힘을 법적으로 축성했다는 조레스(Jean Jaurès)의 해석이 과도하게 피상적이라고 비판하는 ‘수정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소르본의 ‘자코뱅’ 역사가들(퓌레의 표현임)을 정형화ㆍ희화화하며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으로 부르주아지라는 단어를 ‘역사적 사명’의 틀 속에서 덜 신중하게, 특히 공산주의적 역사서술에서, 사용해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정확하게 ‘부르주아지’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이 문제는 대혁명 전체에 대한 해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지만, 부르주아지 자체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드물다. 몇 가지 연구가 있었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하기에 소불(Albert Soboul)은 1962년에 “우리에게는 대혁명 시기의 프랑스 부르주아지에 관한 어떤 역사서술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소불은 바르나브에 기대어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을 갖고 혁명을 주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반대로 퓌레는 ‘부르주아 혁명’은 하나의 개념일 뿐인데다, 사실 개념이라기보다 마르크스식의 섭리주의를 가리는 가면일 뿐이라고 보았다.

크게 보아 (1)자본주의의 대두와 (2)1789년에 부르주아계급이 존재했는가 여부, 이 두 가지가 새로이 문제시되었다.

《자본주의의 대두?》

코반(Alfred Cobban)은 《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제목의 1954년 강연에서 대혁명이 자본주의적이지도 反봉건적이지도 않았다고 탄탄한 근거도 없이 주장했다. 그는 1789년에는 ‘봉건제’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혁명을 일으킨 것은 이론적인 의미의 ‘부르주아’, 즉 산업ㆍ금융 자본가들이 아니라, 토지소유자들, 금리생활자들, 관리들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따르면 대혁명은 자본주의적ㆍ부르주아적 질서를 수립하고 ‘봉건제’를 철폐하려는 시도였다기보다 쇠퇴하며 분노에 찬 재산소유자들이 귀족들로부터 자리를 빼앗고자 한 시도였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향했다기보다는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혁명이었다.”

르페브르는 1956년에 “설사 프랑스혁명이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부르주아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고 대응했다. 소불은 1974년에 “혁명의 결과를 그 지지자들의 의도에 따라서 헤아려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들 중 일부가 부르주아가 아니었다 한들 그것을 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썼다.

이러한 대응은 논쟁을 난해하게 만드는 다른 두 가지 문제를 낳았다. 첫 번째 문제는 부르주아지의 존재와 자본주의의 대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앵케르(François Hincker)의 정확한 지적에 따르면, “아무리 찾아봐도, 마르크스의 글 어디에서도 자본주의적 의미의 생산관계 발전에 의해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문장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전통에 따라 제3신분의 장구한 역사적 상승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부르주아적(bourgeoise)”을 사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1848년 혁명의 실패에서 1870년에 이르기까지를 논하면서, 마르크스는 1789년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레스 이후 너도나도 부르주아 혁명을 자본주의 혁명과 동의어로 취급해왔다.

두 번째 문제는 부르주아지(분석적 개념이 아닌 역사적 실체로서의 부르주아지)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정립된 이론을 따라서 모든 규제를 일괄적으로 철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으며, 각종 규제와 제도를 그에 맞게 활용할 수 있었다.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1789년 8월 4일의 밤 봉건제 폐지 선언과 1791년 6월 노동자의 단결금지를 목적으로 한 르 샤플리에 법률 제정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다.

《부르주아지 혹은 엘리트집단?》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계급갈등’이라는 틀에 대한 비판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테일러(George Taylor)는 18세기 말에 ‘자본주의적 부’가 아니라 ‘지주의 부’가 지배적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지대가 이윤보다 중요했고, 사업가들은 토지와 영주권을 매입하려 했지 체제를 전복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2) 舊귀족, 신흥귀족, 평민층 모두에게서 자본주의적 사업가를 발견할 수 있다. 포르스터(Robert Forster)는 툴루즈의 귀족들이 ‘근검절약, 규율, 엄격한 가산 관리’와 같은 ‘부르주아적’ 덕목을 신봉했음을 밝혀냈다. 이 경우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구분선이 희미해진다. 또 쇼시낭-노가레(Guy Chaussinand-Nogaret)는 가장 역동적인 대기업가들은 오히려 귀족계급 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3) 바이언(David Bien)은 18세기 말 ‘귀족의 반동’이라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장교 진급을 4대에 걸친 귀족으로 제한한 1781년 세귀르 원수의 칙령을 ‘군대의 전문화를 위한 조치’로 해석했고, 이로 인해 舊귀족과 신흥귀족 간의 갈등이 촉발됐다고 보았다. 따라서 출신을 넘어선 ‘열린 귀족층’의 상과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엘리트층의 초상화가 드러난다. 이처럼 귀족 대 부르주아의 대립구조를 ‘엘리트층의 존재’라는 해석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리셰, 퓌레, 루카스(Colin Lucas) 등은 (두 계급 간에) 근본적인 가치의 대립이 없었다고 보며, 토지재산을 향한 일반적인 열망이 우세했다고 주장한다. 그 경우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모두 명사들(les notables)이라 불리게 될 재산소유자 엘리트층에 속했으며, 쇼시농-노가레의 표현에서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에 귀족은 ‘성공한 부르주아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연구자들은 모두 ‘군주적 전제’에 맞서 반란을 추진한 것이 욕구불만 상태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귀족이었다고 강조한다.

이들 해석의 전체적인 결과는 명백하다. 프랑스대혁명에 관한 설명은 사회적 갈등이 아닌 정치적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결과를 가져온 사회혁명이라기보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 정치혁명이었다.”(테일러) 이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분석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바뀐 것은 결정인자들의 우선순위다. 여기에도 다양한 차이가 존재했다. 루카스에 따르면, 귀족이건 아니건 토지를 소유한 영주 엘리트 내에서 “불화의 영역들(혹은 마찰지대, zones de friction)”을 식별해낼 수 있다. 재산소유자들 내부의 이와 같은 경쟁과 알력은 1788~1789년에 삼부회 선거에서 귀족과 非귀족간의 낡은 구분이 되살아나면서 드디어 진정한 위기의 수준에 이르렀다. 엘리트 내에서 하층에 속하던 자들이 사회경제정책에 불만을 품으면서 갑자기 정치적 욕구불만에 휩싸이게 됐다. 그러나 그들(혁명적 부르주아지)은 토지소유자로 이루어진 엘리트라는 관념에 충실했는데, 이 관념은 구체제에서도 잘 작동했으므로, 그들은 1789년의 투쟁에 매우 신중한 자세로 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지 전개 과정에서 루카스는 혁명에 대한 귀족의 반대를 과소평가했다. 그의 해석에서는 ‘불가피한 갈등’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1789년 이전에는 산발적인 “불화의 영역들”만이 존재했던 셈이 된다. 즉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혁명이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냈다.”(루카스) 이것은 1971년과 1978년 글에서 퓌레가 취한 입장의 근저에 있는 생각과 동일하다.

이 모든 것은 국가와 군주정의 위기를 경시하게 만든다. 이런 시각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것(le politique)과 정치적 사건(l’événement politique)을 으뜸가는 것으로 꼽는다.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 혁명’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지 자체가 연구의 지평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소멸인가 마비인가?》

1970~80년대 소불과 퓌레의 ‘거인들의 충돌’은 참호전으로 변했다. 이런 환경은 사회사 연구에 특히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퓌레는 자신이 편집한 《비판적 프랑스혁명 사전》에서 ‘부르주아지’라는 표제어를 아예 제외했다. 사회사 연구는 완전히 방치된 것 같았다. 1974년 《새로운 길》 학술대회에 인구사, 경제사, 종교사, 정치사, 군사는 있었지만 ‘사회사’는 없었다. 답보상태가 심각했다. 소르본 사학자들은 아마도 외국의 연구가 퓌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해외 연구결과를 거의 참조하지 않는 듯했다.

‘부르주아의 대두’와 ‘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le tout-politique)’이라는 극심한 해석 대립 사이에서 다른 길을 찾으려는 시도, ‘비동맹’의 시도, ‘동의하지 않기에 동의하기’의 시도가 설 공간은 매우 좁다. 이런 시도의 한 예로, 로뱅(Régine Robin)은 협회들과 삼부회 진정서를 연구하면서, 진정서를 작성한 부르주아지에게서 모순으로 번민하는 계급, 어쩌면 구체제의 가장 대표적인 계급, 이행의 사회적 형성물, 봉건적 관계와 자본주의적 관계의 뒤얽힘 등을 발견했다. “부르주아지는 최소한 사회경제적 정책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질서의 담지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견해가 한편에게는 너무 이단적이었고 다른 한편에게는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논쟁은 짧게 끝났다.

또 다른 예로, 이르슈(Jean-Pierre Hirsch)는 목적론적 역사관의 거부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적 변화를 퓌레처럼 ‘조작적 관념 혹은 관행의 확산’으로 설명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톰슨(Edward P. Thompson)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계급의 모습을 포착하려 했다. 따라서 “1789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은 단일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계급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통해 만들어지는 중에 있는 사회적 형성물이었다.” 그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즉자적ㆍ대자적인 부르주아의 계급 정체성과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 점점 뚜렷해졌는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계의 참호전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이런 주장의 반향은 매우 약했다.

부르주아지는 어디에나(사료연구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역사해석에서라도) 존재하는 것 같지만, 찾을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프랑스에서 톰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연구는 수가 매우 적으며, 있는 경우에도 대단한 결과를 낳지 못했고, 샤르트르의 공증계약서에서 지방의 유언장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진행한 보벨(Michel Vovelle)만이 겨우 예외라 할 만하다. 이제 언어학적 전환(Linguistic Turn)의 옹호자들 중 일부의 관념론적 일탈과, 정치적 관행의 분석을 무시하는 낡은 정치사의 은밀한 귀환에 유리한 토대가 놓였다.

《사건의 시련을 거친 부르주아지》

1990년대의 사회사는 개인을 사회적 범주 속에 장롱 정리하듯이 딱딱 맞춰 넣는 낡은 지층학적 측량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적 범주들의 물신화(réification des catégories sociales)’에 문제를 제기했다. 범주의 ‘구성’을 중시하는 접근법은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회적 관행이 어떤 것인가를 질문하게 만들었다. “개인을 마치 통 속의 구슬처럼 집단 속에 정리해 넣을 수는 없다”는 르프티(Bernard Lepetit)의 말이 백번 옳다 하더라도, 여전히 개인은 집단 속에서 살아가고,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하고, 때로는 집단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일반화되고 좌표가 요동치는 정치적 순간에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이 혁명가가 되고, 제헌의회 의원이 되고, 상퀼로트가 되고, ‘부르주아’가 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곧 부르주아지의 ‘제조’, ‘형성’, 또는 ‘발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몇 가지 제안을 정리해보았다.

1) 혁명적 변화를 논하면서 발생적 시대착오를 피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참호전의 양편에서 합의가 가능할 것 같다. 1338년의 기사들이 “우리는 중세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백년전쟁을 향해 떠난다”고 선언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런 것을 기대하는 저자가 있으니, 바로 마자(Sarah Maza)다. 마자는 부르주아지가 명시적으로 표명된 명확한 계급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진하게도 “부르주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틀을 깨기 위해 억지로 다른 틀을 만들어 내지는 말자.
2) 콜린 존스(Colin Jones)는 1991년에 진자가 반대편으로 너무 멀리 가버렸다고, 즉 편향된 사회중심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좋지만 또 다른 환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썼다. 도일(William Doyle)의 글을 읽다보면 1789년의 대공포가 8월 4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또 다른 환원주의’다.) 정치문화의 형성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분석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존스의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서비스의 상품화 및 자유직업의 전문화와 이런 영역들에서 탄생하는 시민적 사회성의 새로운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을 배합하여 “조용한 부르주아 혁명”을 이야기했다.
3) 개리오크(David Garrioch)와 뷔르스탱(Haïm Burstin)은 한 계급을 정의할 때 ‘정치적 행태(comportements politiques)’가 결정적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정치적인 것(tout politique)’이라거나 ‘담론에 따른다(tout discursif)’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차라리 정치문화사와 사회사의 유기적 결합이다. 또한 이 설명은 구조의 객관성과 대표의 주관성 사이의 잘못된 논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샤르티에(Roger Chartier)가 제안한 것처럼, 범주화, 관행, 제도화ㆍ객관화된 형식들이라는 사회적 세계의 세 가지 관계형태를 구체화해볼 필요가 있다.

언어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부르주아’와 ‘부르주아지’라는 용어의 불명확함을 들어 사회적 접근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찰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임노동자들이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부르주아’라고 불렀던 직공장, 富로도 양심의 가책을 치유할 수 없었던 도매상인, 교구 진정서들의 원천이 되었던 ‘소작귀족’, 진정서를 작성한 대소인...... 이들은 모두 사회적 잡종이자 돌연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 ‘불안정’이었다. 그들이 부분적으로만 행위자로서 참여한 사건들을 그들 앞에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이 ‘불안정’이었다. 규칙이 바뀌고 사회적 공간이 재구성되는 데에 사건, 관행, 정치적 동원이 크게 작용했다. 그것들을 쇄신된 엘리트 속에, 그리고 ‘부르주아 질서’의 정의 속에 통합시킨 것은 바로 그들이 미라보(Mirabeau)처럼 자신들이 “질서를 다시 세울 사람들이지만, 그 질서는 예전의 질서가 아닐 것”이라고 느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질서는 동시에 사회적ㆍ정치적ㆍ상징적인 것이었으며, 새로운 입장의 배치로써 포괄하게 될 새로운 場이었다.

- Philippe Minard, “L’héritage historiographique”, Jean-Pierre Jessenne (dir.), Vers un ordre bourgeois? Révolution française et changement social, Rennes,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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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새로운 의미론에 각인되었다. 즉 이제 과거…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

제프 일리, <무엇이 민주주의를 만드는가? 20세기 유럽의 혁명적 위기들, 민중정치, 그리고 민주적 성취> 요약-번역

무엇이 민주주의를 만드는가? 20세기 유럽의 혁명적 위기들, 민중정치, 그리고 민주적 성취 (요약-번역)제프 일리
Geoff Eley, “What Produces Democracy? Revolutionary Crises, Popular Politics and Democratic Gains in 20th-Century Europe,”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힘을 크게 상실했지만, 한편 시장원칙의 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