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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TV/설민석)>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선을 넘는 녀석들>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김대보 
한국교원대 

“왕과 귀족은 평민이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찬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모을 국민의회를 결성했고, 성난 시민들은 왕권유지를 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습격했다.1) 그리고 이 습격사건은 최초의 민주화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전 세계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바스티유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은 그곳에 정치범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민중들에 의해 영웅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4년 후, 절대권력이던 루이 16세는 시민들 손에 이끌려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완성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유죄가 되기 전에 왕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과거의 치욕을 복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치욕은 루이르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를 지나가던 루이 16세 앞에서 학생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가 무릎을 꿇고 시를 읊었지만, 루이 16세가 시큰둥하게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통하지 않은 왕의 말로가 비참했다. 이제 민중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국민에 의한 국민공회가 만들어졌고, 3인방(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이 주도했다. 민중들은 혁명이 오면 신세계가 올 줄 알았는데, 이 세 사람이 독재를 시작했다. 여기서 마라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몇 달 안에 십만 명만 죽이게 해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라를 죽인 사람이 코르데인데, 심문 과정에서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답했다. 코르데는 공포정에 맞섰던 암살천사였다. 당시 사람들이 코르데의 미모를 보고 반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라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도 암살당할 수도 있다면서 더 무섭게 독재를 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죽이다가 결국 본인도 죽게 된다.“2)

  위의 내용은 <선을 넘는 녀석들> 5월 4일 방영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방송 화면에 등장한 자막과 출연진의 말을 옮긴 ‘공식적’인 예능의 프랑스 혁명사이다. 파리에서 출연진들이 나눈 대화는 대부분 프랑스 혁명과 관련되었고, 자막과 설민석의 말은 서로를 보충해주며 출연진들의 뒤로 보이는 역사적 현장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위에서 정리한 방송의 내용과 같이 역사적 내용의 정확성 문제에 대해서는 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두터운 역사적 맥락을 생략한 채 당시 발생했던 사건들을 시간 흐름에 따라 듬성듬성 배열한 뒤, 그 사이에 그럴듯한 접속사를 집어넣었을 뿐이다. 

  방송 내용을 따라가면서 배경과 화제를 고려하여 주제를 나눠보면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의 해석, 루이 16세와 일부 혁명가들의 일화, 공포정(Terreur)이 시작된 배경, 프랑스 혁명과 한국 현대사를 비교해서 본 민주화 역사의 특징. 

1) 바스티유 에피소드

  먼저, 출연진들이 콩코르드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치면서 자막에는 “바스티유 광장 :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습격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설명이 나왔고, 설민석은 “전 세계 민주화가 여기서 시작”되었다며 이 광장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전 세계 민주화의 시작인가? 그리고 호의호식하던 왕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가진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결성하는 것을 보면서 민중들은 바스티유를 습격한 것인가? 그렇다면 파리 민중은 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는가? 바스티유는 분명 전제군주제의 상징이었다. 국왕은 그가 싫어하는 사람을 봉인장(lettre de cachet)의 발행만으로도 자의적으로 감옥에 가둘 수 있었다. 작가들, 언론인들, 금서의 저자들 등 많은 사람이 투옥되기도 했다. 또한 봉인장은 가족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도 발행할 수 있었다.3) 이렇게 면밀한 조사나 재판 과정 없이 붙잡힌 사람들이 주로 갇힌 곳이 바로 바스티유였다. 그러나 1789년 7월 당시 이 감옥에는 잡범, 광인 등 총 8명만 투옥되어 있었다. 파리 민중들은 이 8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이 구체제의 ‘흉물’을 공격했다.4) 왕과 귀족들이 군대를 움직여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고 곡물의 부족과 가격 상승이 특권층의 음모 때문이라는 민중의 불안과 분노는 튈르리 궁 앞에서 벌어진 발포사건을 계기로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게 했다. 앵발리드(Invalides)에서 소총을 탈취한 뒤, 민중들은 바스티유에서 더 많은 무기를 획득하려고 했고, 결국 바스티유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물론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킨 사건은 구체제의 전제군주제가 패배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1789년 당시에는 ‘혁명의 상징’은 아니었다.5)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이, 바스티유의 함락은 왕의 반격으로 인해 의회의 대표들이었던 부르주아들이 위기에 처하자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던 민중들이 직접 혁명의 흐름에 뛰어든 사건으로서, 1789년 6월 20일, 새로 제정할 헌법이 굳건한 토대 위에 확립될 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국민의회(l’Assemblée nationale) 대표들의 죄드폼 서약(Serment du Jeux de paume) 만큼 큰 중요성을 가진다.6) 그렇더라도 바스티유 함락이 큰 의미를 가지게 되고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은 바스티유의 함락 이후 감옥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2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전제정의 상징’을 물리적으로 무너뜨린 것과, 이 사건의 의미를 계속 확대하여 보도한 여러 언론 덕분이었다.7) 이렇듯,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를 공격한 것은 단순히 호의호식하던 왕과 귀족들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었고, 바스티유가 전제정의 상징이어서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치범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바스티유를 점령한 민중들이 잡범에 불과한 몇 안 되는 수감자들을 보고 허탈해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수감자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발언은 전혀 근거가 없다. 

  한편,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사건은 이때부터 혁명의 행위자로 등장한 민중이 국민의회의 굳건한 지지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 프랑스 혁명사 연구자의 말처럼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8) 그러나 이 말은 부르주아들이 주도하고 있던 혁명의 흐름에 민중들이 새로운 동력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바스티유 이전의 상황을 무시한 채 바스티유 함락 사건을 (방송에서 자막으로 나왔듯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으로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 왕의 신민이었던 민중들은 진정서(cahiers de doléance) 작성을 계기로 저마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 옆으로 모여 자신의 불만사항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789년 이전 마지막이었던 1614년의 전국신분회 개최 당시에도 진정서를 작성했지만, 1789년에는 달랐다. 루소나 몽테스키외 같이 유명하고 영향력이 컸던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글을 모르던 농민들이 이런 사상가들의 글을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1789년의 진정서는 당시 프랑스인들이 자유, 평등, 특권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9)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대리한다고 말하는 자들의 지역이기주의를 비판하는 등 이미 정치화하고 있었다.10) 또한, 진정서 작성 이전에도 부역(corvée)의 불합리성(강제 노역 노동자·납세자와 도로의 수혜자가 완전히 다른 상황)을 비판하면서 브르타뉴의 농민들은 그들의 의견을 지역 행정 담당자에게 제출하는 등 나름의 정치화를 보여주기도 했다.11) 이러한 민중의 정치화는 프랑스 혁명 직전과 초기 국면에서 전국신분회, 그리고 국민의회 대표들에게 영향을 끼친 중요한 단계였다.

  한편, 바스티유 함락 사건은 민주화의 출발점일까? 방관자였던 민중이 바스티유 함락 사건을 계기로 정치의 전면에 행위자로 등장했다는 점, 즉 민중이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했건 간에) 정치의 흐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와 연결시킬 수 있는 미약한 고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바스티유가 민주화의 출발점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프랑스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명제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국왕주권에서 인민주권 및 국민주권으로 주권을 가진 주체가 이론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 속에서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분명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는 그가 파리 주변에 모은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게 만들었고 네케르(Jacques Necker)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사건의 결과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상관관계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민주주의 출발점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혁명사의 여러 사건들을 보면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보다 1789년 6월 17일에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구성한다고 선언한 것, 같은 해 8월 29일에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그리고 12월 14일의 법령으로 국민의 대표들을 선출하는 방식이 규정되고, 도(département), 디스트릭트(district)의 행정부(directoire)를 시민들의 선거로 구성한다고 명문화된 것이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진전된 상황으로 언급할 수 있다.12) 또는 재산에 따른 제한선거를 폐지하고 21세 이상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를 도입한 1793년 헌법을 민주정치의 발달 과정에서 획기적인 단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전 세계 민주화가 바스티유에서 시작된 것은 더욱 아니다. 설민석의 말과 함께 자막에는 “전 세계 민주화를 이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스티유가 프랑스에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 세계 민주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의 표현은 매우 위험하다. 이 말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종의 보편적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후 인류가 겪은 여러 혁명의 전범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각국이 겪은 민주화 과정이 프랑스 혁명의 아류인 것으로 축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과연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화 과정을 겪은 나라의 국민들은 그들의 1789년에 살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의 민주화 혁명의 영향으로 이후의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를 좇아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켰는가? 실제로 프랑스 혁명을 민주화 혁명의 틀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2011년 프랑스에서 있었다. 2011년 1월에 일어난 튀니지의 혁명에 대해 장 튈라르(Jean Tulard)는 튀니지인들이 1789년에 살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13) 튀니지인들의 민주화 투쟁을 프랑스 혁명이라는 틀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는데, 그 결론은 튀니지 혁명의 향방은 군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가 겪은 정파 갈등과 유혈 사태를 튀니지인들은 아직 겪지 않았고, 프랑스인들이 겪은 이런 과정은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끝났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전 프랑스 혁명사 연구소(IHRF)의 소장인 장-클레망 마르탱(Jean-Clément Martin)은 튈라르보다 조금 나은 듯 보이지만 결국 프랑스 혁명이라는 자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마르탱은 프랑스 혁명이 다른 혁명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고 못 박았지만, 프랑스에서 전통의 이기지 못한 반혁명(contre-révolution)이 있었고, 그 원인은 주로 종교적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튀니지에서도 프랑스와 같이 종교적 전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반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14) 이 지점에서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 혁명사 강좌 주임 교수인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는 우리에게 명쾌한 분석을 던져주었다. <르몽드>에 투고한 글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한 웹사이트에 그 글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세르나는 튀니지인들은 1789년에 있지 않으며, 프랑스보다 220년 뒤처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오히려 튀니지 혁명으로부터 ‘혁명은 가능하다’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15) 즉, 튀니지인들의 민주화 혁명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 역사의 연장선이 아니라 튀니지인들의 고유한 역사의 한 장면이며, 튀니지라는 특수한 지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역사상 처음 발생한 혁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민주화는 민주화 과정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한 정치형태를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각 나라의 독자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을 전 세계 민주화의 시초로 생각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왕좌에 올려놓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2) 루이 16세, 로베스피에르

  출연진들이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도착하자, 자막에는 이 광장이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완성된 유서 깊은” 곳이라는 설명이 추가되었다. 1793년 1월 21일에 루이16세를 처형한 사건이 프랑스 혁명을 완성시켰다면, 프랑스 혁명의 목적은 왕을 죽이거나 왕정을 타도하는 것이었는가? 또는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끝난 것인가? 만약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였다면, 루이 16세를 감옥에 가둔 1792년 8월, 그리고 프랑스가 이제부터 공화국이라고 선포한 같은 해 9월에 이미 혁명이 완성된 것이 아니던가? 일반적으로 혁명이 시작된 해라고 일컬어지는 1789년으로 돌아가보면, 당시 혁명가들 및 민중들은 왕정을 폐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1789년 7월 17일, 파리 시장 바이이(Jean Sylvain Bailly)는 파리 시청에서 루이 16세에게 ‘군주와 인민 사이의 존엄하고 영원한 연합’을 상징하는 ‘삼색 휘장’(cocarde tricolore)을 주지 않았던가.16) 물론 ‘왕’이라는 루이16세는 혁명이 일어난 후 ‘신의 은총에 의한’(par la gr̂̂ace de Dieu)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에서 ‘프랑스 인의 왕’(Roi des Français)이 되면서 자신이 혁명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그의 선대왕들이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왕의 신성성을 잃었다. 즉, 주권을 가진 국민이 그에게 ‘왕’이라는 지위를 준 것이다.17) 국민(nation)의 대표로 구성된 국민의회가 법을 제정할 권리를 가지게 되면서 구체제 하에서 가지고 있던 법의 원천(Rex Lex)이라는 지위도 잃었다. 루이 16세는 국민의 대표가 정한 법을 수호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구체제와 비교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이후 왕위 권위는 크게 하락했지만, 왕정은 폐지되지 않았고, 1791년 헌법으로 규정된 입헌군주제는 1792년 9월에 국민공회(la Convention nationale)가 공화국을 선포하기 전까지 남아있었다. 이 시기 동안 왕은 국민의 대표가 만든 법을 집행하고 인민을 보호해야 하는 집행권력의 수장이면서, 급료를 받는 공무원일 뿐이었다.18) 물론 루이16세를 점점 혁명의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1790년 12월에 이미 마라(Jean-Paul Marat)같은 정치가는 그가 창간한 신문인 <인민의 벗>(L’Ami du peuple)에서 ‘조국’(프랑스)에 반하는 음모의 핵심에 있는 루이16세를 프랑스인의 자유를 회복시켜준 사람으로 선언한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판단하기까지 한 상황에서도,19) 루이 16세가 튈르리 궁을 빠져나와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에 바렌(Varennes)에 들렸을 때, 왕이 도망쳤다는 아직 사실을 몰랐던 이 작은 도시의 주민들은 자기들 마을에 온 일행이 루이 16세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전하”라고 말하며 경의를 표했다. 즉, 그들은 여전히 한 국가의 군주라는 존재가 주는 위엄에 여전히 압도당하고 있던 것이다.20)

  이어서 출연진들이 간 ‘르 프로코프’(Le Procope) 카페에서 설민석은 루이 16세를 처형하게 된 배경으로 로베스피에르를 등장시켰다.21) 그에 따르면 루이 16세가 한 왕립학교에 방문했는데, 학생대표의 환영사에 왕은 무시하다시피 하면서 떠났다. 몇날 며칠을 준비했던 이 학생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인데, 모욕을 당했던 이 학생대표가 열심히 공부해서 법조인이 되었고, 그가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리고 자막으로 “로베스피에르가 과거의 치욕을 복수했다는 주장이 있다!”고 부연설명이 나왔다.22) 

  로베스피에르가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서 루이 16세에게 헌사를 낭독한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자들은 이 일화 자체가 실재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최근 출판된 로베스피에르 전기 혹은 연구서들에 따르면, 이 일화를 전하고 있는 사람은 로베스피에르가 이 학교에 다니던 시기에 교감으로 재직중이던 프로아야르 신부(l’abbé Proyart) 단 한 사람 뿐이다. 이 신부가 1795년에 쓴 한 비망록은 로베스피에르의 학창시절 행적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이지만, 이 글은 프로아야르 신부가 로베스피에르를 괴물로 묘사하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여 작성한 것이다.23) 심지어 에르베 뢰베르스(Hervé Leuwers)는 2014년에 출판한 로베스피에르 전기에서 이 일화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날짜를 전후로 한 루이 16세의 행적을 분석하여 루이 16세와 로베스피에르가 마주친 적이 없다고 확신하기까지 한다.24) 혹 이 일화를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장 마생(Jean Massin)이 그가 쓴 로베스피에르 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일이 훗날 로베스피에르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25) 오히려 로베스피에르가 얼마나 뛰어난 학생이었는지 보여주는 일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26)

  이 일화를 바탕으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설민석은 “소통하지 않은 왕의 말로가 너무 슬프다”고 한다. 자신이 방문한 한 학교에서 학생대표가 헌사를 했는데도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루이 16세가 그에게는 소통하지 않는 왕의 한 단면이었다. 실제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일화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지만, 루이 16세가 과연 ‘소통하지 않은 왕’이었는가라는 문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실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데 루이 16세가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언로를 열어준 일은 한 뜸씨가 되었다. 왕국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특권계층에게 과세하려던 루이 16세의 시도는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선대왕들이 고등법원에 강제로 왕령을 등기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내가 원하기 때문에 합법이다”라는 수사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백성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던 지방 고등법원의 반란 및 귀족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려면 전국신분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귀족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175년 만에 개최되는 신분회의 준비를 위해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진정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진정서는 각 지역별, 신분별 불만 사항을 담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전국신분회의 개최 방식, 즉 신분별(par ordre)/개인별(par tê̂te) 투표와 신분별/공동 심의에 대한 의견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1788년 말부터 1789년까지 출판된 수많은 팸플릿에서도 공통으로 다루고 있다. 이 팸플릿들은 국왕의 신성성을 갉아먹었으며, 시에예스 신부가 쓴 대표적인 팸플릿인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처럼 앞으로 제3신분이 특권계급을 배제하고 국가 운영의 핵심을 맡아야 한다는 논리까지 나아갔다.27) 결국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신분회를 소집하면서 백성들의 언로를 열었지만, 오히려 이 결정이 가져온 파급효과로서 진정서에서 팸플릿으로 이어지는 여론의 형성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신성성을 잃게 된 것이다. 선대왕들처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권위를 잃은 루이 16세는 더 이상 절대군주가 아니었다. 물론 이후 혁명 초기의 루이 16세는 구체제의 제3신분과 협력하기보다 구체제의 회복을 바라는 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비록 그에게 남아있는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국신분회를 개최하겠다고 결정하고 진정서를 통해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다는 점은 이전 왕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소통을 한 왕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3) 국민공회와 공포정

  이어서 ‘프랑스 혁명 이후’의 얘기로 국민공회와 공포정이 등장한다28). 방송의 내용을 잠시 따라가보면, 루이 16세를 민중이 하나가 되어 무너뜨린 후, 1792년에 국민에 의한 국민공회가 설립되었는데, ‘자유‧평등‧박애’를 기초로 한 신세계를 꿈꿨던 민중들 앞에 나타난 것은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독재였다. 글로 시민들을 위협하던 마라를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공포정에 맞선 암살천사가 살해했고, 자신도 암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부분은 사실 앞의 내용보다 더욱 문제가 된다. 혁명의 표어 가운데 ‘형제애’를 뜻하는 ‘fraternité’를 ‘박애’라고 번역하는 흔한 실수는 차치하더라도, 공포정이 등장하는 배경이 개인의 감정 때문이라는 비역사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실제 공포정이 시작된 것은 오히려 민중의 압력 때문이었다. 반혁명 혐의자를 색출하고, 국내‧외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한 일련의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을 때, 이것은 오히려 민중들에게 혁명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당국과 혁명가들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모든 물자를 동원하여 혁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통제 경제가 실시되었고, 구국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를 중심으로 입법권력이 집행권력까지 장악하는 등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혁명과 공화국을 구하기 위한 예외적인 조치들이 끊임없이 취해졌다. 비록 혁명전쟁의 승리를 위한 군 보급 문제가 가장 우선시된 통제경제체제에서 민중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적어도 공포정이 시작될 당시 민중은 이러한 예외적 조치들을 지지했고, 또 바랐다. 그리고 마라 암살 사건 이후 산악파의 지롱드파 숙청으로 연결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정을 강화했다는 것은 당시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일 뿐이다.

  또한, 공포정이 의사일정에 오르기 약 두 달 전, <인민의 벗>(L’Ami du peuple)으로 유명한 마라(Jean-Paul Marat)는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라는 노르망디 출신의 한 여성에게 살해당했다. 코르데는 과연 ‘공포정에 맞선 암살천사’였을까? 그리고 ‘당대인들이 코르데의 미모를 보고 반해 암살천사라고 부른’ 것일까? 암살천사(l’ange de l’assassinat)라는 호칭은 그녀의 미모에 반한 사람들이 붙인 것이 아니라, 마라를 “진정한 무질서의 화신”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이 쓴 <지롱드파의 역사>(Histoire des Girondins)에 등장한다.29) 또한 코르데가 재판 과정에서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죽였다”고 말한 것은 맞는데, 이것이 마라가 했다는 “몇 달 안에 10만 명을 죽이게 해주면 세상을 바꿀게”라는 말에 호응하는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실제 마라는 <인민의 벗> 1790년 12월 17일자에서 10만 명과 관련된 말을 했지만, 방송에 나온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데 혈안이 된 사람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 (...) 1년 전, 여러분은 5~600명을 죽이면서 그들을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줬을 것이다. 오늘은 아마 그 숫자가 만 명일 것이다. 몇 달 안에 여러분은 아마도 10만 명을 죽일 것이고, 여러분은 이 일을 훌륭하게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조국의 무자비한 적들의 씨를 말려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을 위한 평화는 없기 때문이다.”30)

마라는 자신에게 10만 명을 죽이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바꾼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방송에서 편집되어 나온 것처럼 무작위로 10만명을 죽이려는 것도 아니었고, 혁명의 적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어디서 와전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코르데가 10만 명을 구한다고 한 말과 대구를 이루기 위해 끌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4) 프랑스 혁명, 공포정, 그리고 한국현대사

  이 방송을 보면서 가장 놀란 부분은 프랑스 혁명의 교훈에 대해서 설민석이 나름대로 강의를 하는 부분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던 프랑스 민중들은 독재라는 현실을 감내해야 했듯이, 한국에서도 4.19 이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등장했고, 6월 민주항쟁 이후 노태우라는 군인 출신 대통령이 또 등장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민주화는 언제나 좌절을 겪으면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방송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혁명 = 민중 주도의 민주화 + 혁명 이후의 공포정이라는 독재’라는 도식을 선언해놓고, ‘한국의 민주화 과정 = 민중 주도의 민주화 운동 + 군부 독재’와 대치시켰다. 물론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을 독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포정은 전술했듯이 한국의 군부독재처럼 민중의 바람을 거슬러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비록 공포정이 진행되면서 민중의 바람과 어긋나는 부분이 분명 있었지만, 공포정이 탄생할 당시에는 민중이 혁명가들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었고, 혁명가들은 민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을 이러한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1891년 1월 29일 프랑스 하원에서 공화국을 변호하는 연설을 한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를 연상하게 한다. 클레망소는 이 연설에서 매우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프랑스 혁명은 집합체(bloc)다... 우리가 전혀 분리할 수 없는 집합체. 역사적 진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31)

좌파 의원들의 뜨거운 지지와 우파 의원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 연석한 클레망소는 이 ‘집합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1789년의 혁명과 1792년의 혁명을 하나로 묶었다. 그에게 1792년의 혁명은 1789년의 혁명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것이었고, 그러면서 반대파들이 말하는 ‘좋은’ 혁명과 ‘나쁜’ 혁명의 구분을 반박할 수 있었다. 즉, 클레망소가 혁명을 하나의 집합체로 본 것은, 피를 흘리면서 탄생한 공화국의 약한 토대를 공격하던 반대파들을 이기기 위해 도입한 논리였다. 이는 방송에서 설민석과 김구라가 동시에 말한 ‘우상향’이라는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다. 좋은 혁명 뒤에 피를 흘리는 나쁜 혁명이 있더라도 이것을 하나의 혁명 과정으로 보면 후퇴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뜻이 된다. 비록 출연진들이 민주화는 좌절이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좌절을 겪는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이러한 ‘집합체’와 같은 과정을 상정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나온 오류를 위에서 모두 다 지적하지는 못했지만, 한 예능 프로그램이 전파한 ‘프랑스 혁명사’의 큰 틀만 봤을 때에도, 굵직한 오류가 존재했다. 이러한 오류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토대로 삼아 방송을 제작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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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 말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특권층의 호의호식에 대한 제3신분의 분노가 국민의회의 수립과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이라는 두 가지 병렬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식으로 프랑스 혁명 초기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MBC <선을 넘는 녀석들>, 2018년 5월 4일 방송 내용 정리.

3) 주명철, 「앙시앵 레짐 말기 가족 속의 여성」, 한국서양사학회 편, <서양의 가족과 성> (당대, 2003), pp. 110-119.

4) Vovelle, Michel, La Révolution française expliquée à ma petite-fille (Paris, 2006), p. 31.

5) Bocher, Héloï̈se, Démolir la Bastille : L’édification d’un lieu de mémoire (Paris, 2012), p. 12. 

6) Ibid, p. 194 ; Michel Vovelle, La Révolution française expliquée, p. 34.

7) 주명철, 「루이 16세 재판과 죽음」, <서양사론>, 104호 (2010), p. 150. 바스티유 감옥의 철거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문헌을 참고 : Bocher, Héloï̈se, Démolir la Bastille.

8) 양희영,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민음인, 2015), p. 40.

9) Grateau, Philippe, Les Cahiers de doléances. Une relecture culturelle (Rennes, 2001), p. 334.

10) 이러한 비판은 특히 랑그독에서 랑그독 신분회가 추진한 공공사업(travaux publics) 문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참고 : Slonina, Jérô̂me, La politique routière des Etats de Languedoc de 1753 à 1789, thèse de Doctorat en droit, Université des sciences sociales de Toulouse, 1999.

11) 브르타뉴에서 부역과 민중의 정치화 문제는 다음의 문헌 참고 : McDonough, Katherine, Building the Roads : Expertise, Labor, and Politics in Provincial France, 1675-1791, thesis of Ph. D, Stanford University, 2013.

12) “Teneur du Décret portant constitution des Municipalités”, 14 décembre 1789, in Collection Baudouin, url : http://artflsrv02.uchicago.edu/cgi-bin/philologic/getobject.pl?c.0:335.baudouin0314. (2015년 6월 10일 검색)

13) Le Monde [en ligne], “Jean Tulard : L’an 1789 de la révolution tunisienne”, 19 janvier 2011, url : https://www.lemonde.fr/afrique/article/2011/01/19/jean-tulard-l-an-1789-de-la-revolution-tunisienne_1467392_3212.html (2015년 5월 13일 검색). 

14) Le Monde [en ligne], “Le renvoi à 1789 égare plus qu’il n’éclaire”, 11 février 2011, url : https://www.lemonde.fr/idees/article/2011/02/11/le-renvoi-a-1789-egare-plus-qu-il-n-eclaire_1478636_3232.html (2015년 5월 16일 검색).

15) Comité de Vigilance face aux Usages Publics de l’Histoire (CVUH), “Les Tunisiens ne sont pas en 1789! ou impossible n’est pas tunisien”, 3 février 2011, url : http://cvuh.blogspot.com/2011/02/les-tunisiens-ne-sont-pas-en-1789-ou.html (2015년 6월 3일 검색). 또한 이 말은 2012년, 당시 프랑스 혁명사 연구소 소속 교수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에 피에르 세르나가 쓴 문장은 이런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 “혁명은 절대 반복되지 않는다. 혁명은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다시 발명되기 때문이다”(Serna, Pierre, “Toute révolution est guerre d’indépendance”, Chappey, Jean-Luc, Gainot, Bernard, Mazeau, Guillaume, Régent, Frédéric, Serna, Pierre, Pour quoi faire la révolution (Marseille, 2012), p. 49). 이 책은 2013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 김민철, 김민호 역,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두더지, 2013).

16) Soboul, Albert, La Révolution française (Paris, 1982), p. 154.

17) Vovelle, Michel, La Révolution française expliquée, p. 39.

18) Soboul, Albert, La Révolution française, pp. 190-192.

19) L’Ami du peuple, ou le publiciste parisien, 9 décembre 1790, p. 6.

20) Tackett, Timothy, When the King Took Flight (Cambridge, 2003).

21) 방송 내용에 따르면, 이 카페에서 혁명가들이 혁명을 ‘모의’했다고 한다. 몇몇 혁명가들이 카페에 모여서 밀담을 나누며 기획할 정도로 프랑스 혁명이 즉흥적이고 개인적인가? 

22) 이 부분은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의 ‘로베스피에르’ 항목에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 따르면, “추위와 비오는 와중에도 국왕 루이 16세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교사들에 의해 동원되어 학교 청소 정리를 해야 하는 것과, 수고한 학생들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루이 16세 내외를 보고 사려가 부족한 지도자라고 질타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국왕 내외를 서서히 불신하기 시작, 국민공회에서 루이 16세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즉시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했다”(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로베스피에르’, url :https://ko.wikipedia.org/wiki/%EB%A7%89%EC%8B%9C%EB%B0%80%EB%A6%AC%EC%95%B5_%EB%93%9C_%EB%A1%9C%EB%B2%A0%EC%8A%A4%ED%94%BC%EC%97%90%EB%A5%B4, 2018년 10월 19일 검색). 이 항목에서 로베스피에르와 루이16세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할 때 사용된 참고문헌은 18세기 프랑스 정치사상 전문가인 루스 스커(Ruth Scurr)가 쓴 <치명적 순수>(Fatal Purity)라는 책이다 (Scurr, Ruth, Fatal Purity : Robespierre and the French Revolution (New York, 2006)).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루이 16세와 로베스피에르의 만남을 보여주는 이유는 로베스피에르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왕정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이 만남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한편,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로베스피에르’항목에는 이 만남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프랑스어판의 같은 항목에는 뢰베르스가 쓴 로베스피에르 전기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이 만남이 1775년에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23) Belissa, Marc, Bosc, Yannic, Robespierre. La fabrication d’un mythe (Paris, 2013), pp. 33-34

24) Leuwers, Hervé, Robespierre (Paris, 2014), p. 28-31. 뢰베르스는 로베스피에르와 국왕이 1773년이나 1779년에 만났을 가능성은 있다며 이 둘 사이의 만남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25) Massin, Jean, Robespierre, 양희영 역,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교양인, 2005), pp. 50-51.

26) Martin, Jean-Clément, Robespierre. La fabrication d’un monstre (Paris, 2016), p. 24.

27) Siéyès, E.-J., Qu’est-ce que le Tiers-Etat?, 3e édition (Paris, 1789). 혁명 직전의 팸플릿과 여론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 : 박윤덕, 「프랑스혁명 전야의 팸플릿 전쟁」, <프랑스사 연구>, 22호 (2010).

28) 국민공회의 수립과 공포정의 시작을 프랑스 혁명 ‘이후’의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민석은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과 왕정의 폐지(왕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왕정이 사실상 몰락한 1792년 8월 10일, 또는 프랑스가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하면서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1792년 9월 21일) 사이를 프랑스 혁명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방송 내용 가운데 앞서 언급했던 ‘루이 16세 처형으로 프랑스 혁명이 완성되었다’라는 점과 연대기 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국민공회의 시작은 1792년 9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은 1793년 1월 21일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민주화’혁명으로 인식하면서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과 왕정의 몰락을 프랑스 혁명의 출발과 종료 지점으로 삼는다면,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혼동하는 것이다. 

29) Bianchi, Serge, Marat : 《L’Ami du peuple》 (Paris, 2017), p. 237 ; Mazeau, Guillaume, Le bain de l’histoire. Charlotte Corday et l’attentat contre Marat 1793-2009 (Seyssel, 2009), p. 294. 라마르틴이 ‘암살천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문단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조국의 숭고한 해방자이고 폭군을 죽인 용감한 살인자를 위해, 그녀(코르데)를 향한 우리의 환희와 그녀의 행동을 평가하는 엄격함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이름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면, 존경과 두려움이라는 양 극단의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암살 천사라고 부를 것이다”(Lamartine, Alphonse de, Histoire des Girondins, tome 6 (Paris, 1847), pp. 267-268).

30) L’Ami du peuple, 17 décembre 1790, p. 6.

31) 클레망소의 연설 전문, url : http://www2.awwemblee-nationale.fr/decouvrir-l-assemblee/histoire/grands-moments-d-eloquence/georges-clemenceau-1891-la-revolution-est-un-bloc-29-janvier-1891 (2015년 5월 31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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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

극중도(l'extrême centre) 개념

"극중도(l'extrême centre)"는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혁명사강좌주임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 교수가 2005년에 낸 책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라자르 카르노를 비롯해 현 프랑스의 "기술관료지배"를 만들어낸 1789-1830년 혁명세대의 몇 가지 사상적 조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카르노, 콩스탕, 레알, 당글라,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밖에 수십 수백의 추종자를 거느린 이념이자 입장으로서, 극중도는 왕당파도, 완고한 보수주의도, 급진적 민주주의도 거부하고, 국가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길러낸 초엘리트가 인민을 계도하고 인민에게 봉사하되 인민의 통치를 결코 받지 않는 정치를 가리킨다.
극중도의 이념은 온건한 개혁을 통한 단선적이면서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법률과 행정을 통한" 진보를 추구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의회와 토론이 아닌 행정부와 실행력이 전진의 동력이다. 그래서 극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모든 준동을 때에 따라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국가폭력으로 찍어누르고 엘리트가 규정한 부국강병 및 점진적인 인류진보의 전망에 따라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며, 세르나의 표현으로는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이념과 논의도 허용하지 않는" 국가이념이다. 
따라서 버크식 보수주의나 로베스피에르식 진보주의의 프레임으로는 극중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을 바꾸는 팔랑개비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 뿐이다. 극중도는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세르나가 볼 때 20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를 지배한 국가사상의 근간이다.
(세르나는 감정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극중도에게 탄압 당하고 유배가야했던 민주파에 가장 크게 공감하면서도 이 책에서 놀라울 만큼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