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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일리, <무엇이 민주주의를 만드는가? 20세기 유럽의 혁명적 위기들, 민중정치, 그리고 민주적 성취> 요약-번역

무엇이 민주주의를 만드는가? 20세기 유럽의 혁명적 위기들, 민중정치, 그리고 민주적 성취 (요약-번역)

제프 일리

Geoff Eley, “What Produces Democracy? Revolutionary Crises, Popular Politics and Democratic Gains in 20th-Century Europe,”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힘을 크게 상실했지만, 한편 시장원칙의 거의 보편적인 승리는 경제에 기초한 공공연하게 유물론적인 정치이론에 입지를 제공했다. 실제로 자본축적의 논리와 경제의 명령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現局面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1848)>에서 묘사했던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승리와 섬뜩하게 닮았다.

세계은행은 보고서 <계획에서 시장으로(1996)>에서 <공산당선언>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 독일어 원문은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로, “모든 신분제적이고 정체된 것은 증발한다”는 의미다)”는 저 유명한 글귀를 인용해서 現事態를 묘사했다. 실제로 자본주의 팽창에 방해되는 것은 가차 없이 쓸어내는 의기양양한 자유시장질서의 像은 21세기 초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데, 에릭 홉스봄은 <공산당선언> 150주년판 서문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을 비롯해 역사의 향방을 지시하는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 사상의 유효성을 크게 침식한 사건들은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예증한다. 또 신자유주의 사상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자본주의적 경제관에 완전히 종속시켜서, 시장경제의 요구가 현실정치의 범위를 결정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이런 논의에서 민주주의 자체는 명백하게 부수적 현상으로 강등됐다. 1989년 이후의 담론에서 민주주의는 더 거대한 과정들에 부속되고 스스로 자원을 동원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어떤 접근법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래로부터의 압박과 동원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아담 쉐보르스키는 1970년대 후반 南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권위주의 지배로부터의 이행”을 평가하면서 “민주적 전환이 성공하려면 조직된 노동자들의 전적인 순응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폴란드와 헝가리의 例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협상을 통한 이행이 1989년의 변화들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고 할 것이며,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중동원은 중요성을 박탈당하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이행도 하향식 개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1970년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이행에서도 민중동원은 부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그리고 위로부터의 협상과 개혁은 민중동원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역할을 해낸 것으로 그려질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산주의 몰락 이후 민주화의 성공은 자유경제와 시민사회라는 두 가지 형태의 구조조정에 달려있다. 공산주의에서는 통제경제와 얼어붙은 시민사회로 인해 민주화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새로이 수립된 민주주의 체제들의 성공과 실패는 –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건 다원적 시민사회의 성장이건 – 다른 곳에서 전개된 역사들의 이차적 효과일 뿐이다. 한편 이것은 “서양”의 역사에 대한 특정한 방식의 독해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런 독해는 실제로 서양의 민주주의 확립에서 중요했던 민중전위, 사회갈등, 정치투쟁을 남김없이 말소했다.

민주적 이행에 관한 上記 관점들은 터무니없을 만큼 非역사적이다. 그것들은 서유럽의 역사가 제공하는 길잡이를 놀라우리만큼 무시하며, 중요한 지식과 이해를 삭제하려 든다. “시장”에 대한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적 찬양이 “개혁”의 언어를 독점하면서 민주주의의 또 다른 계보학을 억압하고 있는 오늘날, 20세기 민주화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고찰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역사가들, 수정주의, 혁명>

本書 편집자들도 지적했듯이, 17세기 영국, 18세기 프랑스, 20세기 러시아로 이어지는 과거의 민주주의적 대약진들에 대한 재해석과 축소가 최근 역사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1970~1980년대 사회사 연구는 스탈린 통치기에 이르기까지 相異한 시기들의 정치형태와 그것에 관련된 국가형성의 논리 사이의 관계, 신흥 소비에트 사회에 부과된 압박과 제한, 相異한 범주의 사회적 행위자들이 행사한 힘의 작용을 연구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는 이런 연구를 단절시켰다. 위 연구의 반대자들은 1991년의 사건을 러시아혁명의 정당성 결핍의 증거로 간주했다. 1990년대 초기의 신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反볼셰비키주의가 새롭게 개방된 모스크바 문서고 자료에 대한 편파적 독해에 기반을 두고 득세했다. 1917년에 대한 엄격하게 정치적인 讀解가 복권되어 소련史에 등장한 폭력을 모두 볼셰비키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 사상에 기인한 것으로, 나아가 혁명을 일으켜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 자체에 언제나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효율성은 그들의 무자비한 권력 추구, 다시 말해 중앙집중적 조직, 권위주의적 지도력, 음모, 절대적 확신, 역사의 향방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명제가 부활했다. 20년 동안 볼셰비키가 민중의 열망에 화답했음을 강조해왔던 사회사가들은 이제 정치의 자율성을 전투적으로 되살려내는 음모론적 해석의 부활에 직면했다. 다원주의의 부족, 독재 경향, 대의를 위한 민중의 희생을 의미하는 레닌의 “자코뱅주의”가 다시 논제가 되었다.

이 수정주의는 自認하듯이 공산주의 이후의 사회정치적 제도들과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단단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 새로운 反볼셰비키 역사서술은 공산주의뿐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적대적이다. 냉전기 자유주의의 고전인 제이콥 탤먼의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원(1952)>은 새 생명을 얻었다. 이 책은 프랑스혁명의 자코뱅期를 철저하게 우익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공산주의와 급진주의의 정당성을 부정했는데, 이에 따르면 “혁명”은 민주주의의 天敵이다. 최근 혁명사 재해석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권위에 대한 모든 직접적 도전과 대중행동은 파괴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하며, 정답으로서 점진주의를 내세운다.

러시아혁명의 정당성에 대한 대대적인 부정은 핵심적인 민주적 성취에 대한 더 큰 전제들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혁명은 냉전의 절정기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파괴적이고 해로운 사건으로, 즉 기능장애, 誤導된 민중의 폭발, 손해막심한 迂廻, 권력에 굶주린 자들의 음모, 구체제의 퇴행성과 무능의 유감스러운 결과로 간주된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건강하게 이루어졌을 발전을 혁명이 가로막았으며, 혁명에는 긍정적인 면이 하나도 없고, 공포정치는 혁명가들의 열의로부터 당연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런 혁명관은 혁명을 일차적으로 행위자들을 움직이는 관념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자 그것을 가능케 하는 담론적 환경의 산물로 본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오직 혁명의 언어를 1970년대부터 축적되어 온 사회사의 연구성과로부터 떼어놓을 때만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사상사는 이 사회사 연구에 맞추어 맥락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로 프랑스혁명에 대한 영어권의 재치 있는 새로운 역사서술이 위 시각에 도전했다. 루데, 홉스봄, 틸리, 톰슨의 선구적 연구들에 자극 받은 일군의 연구자들이 바스티유 함락에서부터 파리 코뮌에 이르는 역사적 봉기들을 사회적 분석의 주제로 삼아서, 르페브르, 소불, 콥의 고전적 연구와 함께 프랑스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시기를 정당한 민중적 민주주의 사건으로서 확립했다.

1789년 혁명의 200주년인 1989년에 마침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퓌레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몰락이야말로 자코뱅이 내놓은 급진민주주의적 환상의 파산 및 최종적 패배를 확인해주는 것이며 1789년 여름의 건강한 관념의 유산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외고 다녔다. 그는 1789년보다 더 급진적인 희망은 자코뱅주의건 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 그저 정통 민주주의 道程에서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퓌레는 계속해서 1917년은 1793년의 미래였으며 1793년의 논리는 1789년에서 출발했다고, 즉 혁명가들이 “정치행위에 부여한 무제한적 力能”이 공포정치의 “狂信”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혁명은 사회 개조의 꿈을 꾼 것만으로도 처음부터 재앙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퓌레와 그의 동료들은 사회사 연구의 성과나 구조적 요인을 모두 배제한 채 철저하게 혁명의 사상사 內에서 작업을 수행하려 했다. 따라서 퓌레 자신의 “정치적 전환”은 사회사에 등을 돌리는 지적 전향이기도 했다. 퓌레는 정치적 입장을 사회적 의미로 해석하거나 신념 표명과 물질적 이해관계의 구성 간의 접합을 탐구하는 것을 모두 속류 마르크스주의 또는 편향적인 환원주의로 간주했다.

이런 식으로 관념과 실제상황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부적절한데도 1990년대에 “물질적” 요인과 “담론외적” 요인을 거론하는 것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이 역사적 논의에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지성사 및 문학비평의 방법론만을 사용하면서 철저하게 문자를 통해서만 사회의 복잡한 모습을 이해하려 드는 것은 가당치 않다. 개별 혁명가의 선택과 이 선택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구조지은 요구, 제약, 개연성의 배치를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이 점에서 관념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퓌레의 이해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다. 로제 샤르티에는 1989년의 논쟁에서 “사건을 엄격하게 철학적ㆍ정치적으로 읽겠다는 것은 결국 역사적 이해가능성을 당대인의 의식에 종속시키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1990년대에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가 시장관계와 시민적 덕성의 속박되고 축소된 관념으로 제한된 것은 계급기반 사회분석의 후퇴와 더불어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역사가들의 상당한 수정주의적 경향을 반영한다. 혁명은 예전에 사회사가들이 해석의 주춧돌로 삼았던 사회적 위기, 물질적 갈등, 민중 운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특히 민중전위는 이제 민주주의적 대약진의 정당성을 제공하기를 그치고, 공포정치의 오명을 짊어지게 됐다. 수정주의에 따르면, 혁명의 도래와 급진화가 구체제에서 이미 형성중이던 “근대 정치문화”의 관념과 제도들을 납치했고, 정치적 양극화는 그 후의 진보를 방해하고 제한했다.

그러나 지난 두 세기 동안 민주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전진에서 혁명은 핵심적이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과 반대로, 민주주의의 가장 의미심장하고 지속적인 성취는 불의ㆍ권위ㆍ억압에 대한 저항이 수반한 소란과 무질서를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비열함ㆍ폭력ㆍ잔인함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무질서는 진보에 필수적인 공간을 열어젖혔다. 즉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과 역량을 확대한 것이다.

혁명에 대한 평가를 퓌레처럼 주요 사건들의 철학적 의미와 담론적 구조물로 제한하면 혁명의 생성적 조건, 지속적 효과, 경험적 활력, 총체적 힘을 완전히 잘못 보게 된다. 혁명은 민중의 민주적 열망의 유일무이하게 감동적인 광경이다. 또 혁명은 그에 따르는 파괴에도 불구하고 필요하고 바람직한 변화의 담지자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말하면, 혁명은 불가피하다. 이 글은 혁명적 위기와 보통사람들의 삶과의 관계를 밝힌 1960~1980년대 사회사 연구의 정신을 이어받아 20세기 민주주의 대두의 동학을 고찰함으로써 민주주의 논의에 복합성을 회복시켜주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定義>

완전한 민주주의의 엄격한 법률적 정의는 자유ㆍ보통ㆍ비밀ㆍ성인ㆍ평등 선거권에 기초하고, 표현ㆍ양심ㆍ집회ㆍ단결ㆍ언론의 자유가 보완하며,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와 재판 없는 체포로부터의 자유가 떠받치는 인민주권과 책임통치라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보면 1914년 이전에 일부 주변부 국가들을 제외한 어느 정치체제도 아주 미약한 정도의 민주주의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1918년 이후에야 유럽에서 정상적인 政體로서 통용됐고, 1920~1930년대에 많은 나라에서 채택됐으며, 1945년 이후에는 국제적으로 전파되면서 더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증식력을 얻었다. 1918년ㆍ1945년 두 시기는 유럽에서의 민주주의의 성장을 위한 특정한 종류의 사회적 배경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바로 두 번의 세계대전에 관련된 대규모 사회적ㆍ정치적 동원이다.


이러한 법률적인 정의를 넘어서, 민주적 성취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이론화할 방법이 필요하다. 실제 민주주의의 떠오름과 그것의 實在를 산출하는 복합적 역사들을 아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의기구와 법률적 시민권에 관한 정치적 투쟁의 무대에만 집중하지 말고 20세기에 다음을 포함하게 된 광범위한 맥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1. 복지국가의 대두가 내포한 야심찬 사회권 개념.
2. 시민자격의 확대. 이것은 전국적 정치무대에서 명시적인 비준을 받지 못하거나 법률로써 제도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승인하는 법률에 앞선 승인의 요구가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법률이 모순과 결함을 해소하는 능력을 고루 발휘하지는 못함을 보여준다.
3. 公私 경계의 流動. 개인의 삶, 친밀한 관계, 사회적 신체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규제와 개입의 영역에서. 특히 가족ㆍ性ㆍ도덕 질서에 관해.
4. 대중매체의 영향이 漸增하는 공론장의 多變的 정치공간.

위 사회적 실천과 관계의 영역은 모두 혁명적 위기 중에 극적으로 문제시됐다. 또 여기서 性(gender)의 문제도 고려해야 하며, 특정한 민주적 진척의 폭과 효과를 평가할 때는 민주적 성취에 여성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도 고려해야 하지만 性差의 질서에서 나타나는 변화들도 고려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놓고 이 글에서 제시하는 확대된 정의는 오늘날 脫공산주의적 이행의 담론을 지배하는 고도로 형식적인 정의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특정한 제도변화, 법적 권리, 형식적 헌정절차의 달성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분야의 사회적ㆍ정치적 갈등으로부터도 나타나는 것이며 복잡한 역동적 차원을 갖는 것이므로, 역사적 접근법으로써 법률적 정의를 보완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동유럽과 舊소련 지역에서는 시장이 경제주의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정의한 맥락만이 고려되는 경향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정적 확대는 몹시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사회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대규모의 민중동원이 기존 정치의 틀을 깨고 변화를 위해 문을 열어젖힐 때 일어난다. 20세기의 주요 전진은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 기존 권위의 파괴, 정치적 대립의 격화, 격정, 과잉과 과격함, 正常性의 붕괴를 수반했다. 혁명적 위기야말로 민주적 성취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먼저 1917~1923년 제1차 대전기에 민중운동이 만들어낸 기회로부터 새로이 민주정들이 수립됐다. 뒤이은 1945~1949년 제2차 대전 때는 앞서와 같은 민중운동이 없었지만 나치에 대항하는 저항운동(레지스탕스)이 그것을 대체했다. 두 시기 모두 직전의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이 더 민주적인 미래를 향한 돌파구를 만들었다. 전례 없는 국가폭력의 상황과 맥락을 무시하고 혁명이 초래한 폭력만을 단순하게 비난하는 것은 獨掌難鳴일 뿐이다. 上記 두 시기 모두 이전의 正常狀態로, 즉 1914년 이전의 구체제로나 1930년대의 권위주의적 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완전히 고려 밖이었다. 구체제와 나치를 괄호 속에 넣어서 무시해버리고 뒤이은 혁명의 폭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허울 좋은 편파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혁명의 정치적 격동은 그 직전에 존재하던 과격함과 떼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혁명의 과격함은 기존 지배세력의 반동과 저항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힘에서 밀리기 전까지는 결코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지속적인 민주적 변화들은 혁명적 위기가 낳은 위험한 기회들로부터만 나타났던 것이다.

<시민권과 국가의 변증법, 1914~1923년>

이렇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순전히 형식적ㆍ법률적인 정의의 결함이 뚜렷해진다. 특히 민주주의를 1914년 이전 유럽의 제한적인 의회민주주의 헌법들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것이다. 바로 그 헌법들이 아우르지 못한 열망들이 1918년의 약진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물론 1914년 이후의 투쟁에서도 의회주권과 선거과정이 법률적 민주주의의 핵심이었고 새로운 동원의 중심적 요소였으며, 혁명가들이 그것들의 가치를 간과한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재난을 맞이했다. 그러나 1914~1923년에는 온건한 의회제와 우파의 틀을 극적으로 넘어선 또 다른 민주화의 차원들이 존재했다.

a) 첫 번째 차원은 의회 바깥에서의 사회운동이 민주주의적 타결(settlement)에 미친 영향이다. 넓은 사회적 영역에서의 집단행동과 조직의 甲冑는 노조운동, 여성운동, 그 밖의 단편적이고 지역적인 운동으로 구성됐다. 그에 맞게 헌법률에 기초한 민주정의 정의에 대한 필수적 대응물로서의 시민사회 관념이 발전했다. 이런 의회 外 운동의 성장은 그것을 대표할 의회기관들의 역량을 초과했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임시정부에게 질서의 문제를 제기하는 심각한 긴장의 방아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혁명기 최고의 민주적 활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b) 두 번째 차원은 복지국가의 형성이다. 전례 없는 전시동원 상황으로 인해, 대규모 자원의 전쟁 투입과 전쟁의 참상에 대한 대응으로서 정부개혁을 위한 연합이 형성되고 戰後 사회적 개선에 대한 열망이 널리 퍼지게 됐다.

c) 세 번째 차원은 극우파의 대중동원이다. 이 운동은 공공연한 反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공론장 참여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민주적 역량을 산출하는 상징적 효과를 가져왔다.

d) 마지막 차원은 직접민주주의적ㆍ공동체적 참여정치 형태들이다. 이것은 주로 1917~1921년 소비에트와 노동위원회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지만 그 외에도 이 시기 유럽의 민중민주주의가 끓어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다양한 형태들이 있었다.

이 국면의 혁명적 차원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를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혁명가들의 의식적 행위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정치적 세력과 가능성의 총체적인 구성을 관찰해야 한다. 1918년 정치적 타결들의 민주적 내용물을 모양 짓는 데는 볼셰비키와 당대 극좌파 자체보다는 그들의 도전이 촉발시킨 다양한 개혁의제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혁명좌파세력이 미약하고 사회주의 정당들이 戰後 선거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곳에서도 굵직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에서는 단체교섭, 8시간 노동, 선거개혁을 성취했다. 벨기에의 개혁은 8시간 노동, 누진세, 사회보험법, 선거개혁을 포함했다. 네덜란드, 영국, 스칸디나비아 지역,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도 수준은 相異하지만 괄목할 만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대대적인 토지개혁도 있었다.

1914년 이전 총선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의 득표율이 2할을 넘었던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스칸디나비아 등 “사회민주주의 중심지”와 프랑스, 영국, 베네룩스에서는 이런 戰後개혁들로부터 민주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대두했다. 게다가 좌파의 인상적인 성장은 사회주의적 진전보다는 의회민주주의 내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 성취 중에서도 특히 공론장의 증강을 통한 시민사회의 강화는 민주화의 핵심적 버팀목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신흥주권국가들에서 立法을 통한 공론장의 확립은 국민형성 기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적 합법성의 형식과 강력한 공식적 헌법들은 1920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조직한 민중적 민주주의의 잠재력에 불가결했다. 赤비엔나의 성취는 법의 보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이는 1933~1934년 두 공화국의 종언에서뿐 아니라 1918~1919년의 시작부터 명백했다.

더 나아가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20세기 전반에 유럽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민주적 전진은 1776~1815년 및 1859~1871년의 汎유럽적 제헌과정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위기로 인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의 총력전은 여러 해에 걸친 사회 전체의 동원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의 자원과 인구에 대한 국가의 요구를 크게 확장시켰다. 1989~1992년의 제헌과정은 전쟁에서 비롯하지 않았지만, 이것도 사회의 平時 군사화라는 설득력 있는 가정 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의 대규모 약진이 역설적으로 국가권력을 크게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20세기의 대대적인 민주적 혁신에서는 모순적이게도 한편으로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증강시키는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양차대전을 통해 새로운 민주적 역량이 나타나 법률적ㆍ제도적ㆍ정치적 개혁의 타결로 조직화되고 공화주의적 헌법과 사회적 대타협을 낳은 한편, 전례 없는 사회적 동원의 결과로 국가권력의 요구가 증대되어서 효과적인 책임과 통제가 어려워졌다.

이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단기적ㆍ물질적 효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국가를 강화하는 만큼이나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대체로 국가를 강화시켜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는 1918년 이후 정치적 붕괴 없는 민주주의의 성장을 누렸지만, 1917~1918년에 러시아, 오토만,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제국의 기존 국가는 와해됐다.

이 역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사회적 계약이나 역사적 타협의 관념을 활용하는 것이다. 대규모의 사회적 개선의 약속을 중심으로 戰後再建의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협상의 구체적인 조건들은 終戰이 가져온 정치적 상황만큼이나 다양했지만, 그 중심에는 애국수표의 지급(cashing of the patriotic cheque) 문제, 즉 전시동원의 대가로서의 상당한 사회적ㆍ정치적 개혁 문제가 있었다. 戰後에 정치권력이 붕괴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더 급진적인 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전망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지만, 기존 정치권력이 유지된 곳에서는 사회적 타협의 내용이 더 온건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장기적 결과는 들쭉날쭉했다. 한편으로는 全유럽 차원의 민주적 제헌과정이 극적으로 변형된 政體와 국제체제를 낳았다. 특히 신흥국가들의 헌법이 몹시 민주적이었으며, 인상적인 사회개혁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아가 소비에트와 노동위원회의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도전받고 자극받았다. 다른 한편 1920년대 말이 되면 유럽에서 이 타결이 유지된 곳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신흥 민주주의는 戰後 첫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민중문화, 1945~1968년>

1918년 이후 민주적 타결의 불안정을 설명할 한 가지 핵심적 요소로 제헌(constitution-making)과 문화형성(culture-building) 간의 구분을 들 수 있다. 1920~1930년대의 정치적 붕괴는 막 떠오른 사회적 합의의 상대적 빈약함과 그것의 민주적 가치들의 취약성을 반영했다. 이 취약성을 이해하려면 공론장의 역할을 생각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공론장 개념을 사회의 자기조직이 정당성을 얻고 법률적으로 공적 공간을 보호하는 모든 방식들, 즉 온갖 종류의 집단적 조직, 정치적 정체성의 형성, 의견의 표명, 사상의 유통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이 공론장은 上述한 것처럼 1918년과 1945년의 戰後 정치적 타결의 민주성에 핵심적이었다.

공론장의 강화는 분명 법률개혁과 제도변화의 문제로서 접근할 수도 있으며, 이런 견지에서는 양차대전 모두 국가권력 강화 및 제한이라는 모순적 이중효과를 보였다. 한편으로 공적 삶의 군사화는 자유를 크게 침해했으며, 검열ㆍ감시ㆍ비상법률ㆍ계엄령은 공론장의 민주적 활용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戰時의 합의에 포함된 온갖 집단들이 적법성을 획득하고 돌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국민으로 인정된 영역에 새로운 집단들이 들어왔다. 그 중 가장 명백한 집단은 조직된 노동계급이지만, 그 밖에도 여성, 청년, 하급군인처럼 그때까지 자신만의 역사를 구성하지 못했던 집단들이 정치영역 속으로 호출되었다. 이제 平時 복귀 후 위 상황의 유지가능성 및 유지방법이 진정한 문제로서 제기됐다. 이와 관련하여 중부유럽에서 군사적 몰락 이후 새로이 수립된 국가들에서 나타난 민주적 합의들의 취약성이 핵심변수가 되었는데, 1918년 이후 민주적 합의는 충분히 광범위하고 탄력 있는 정치문화로 조직되지 못했다.

여기서 법률, 제도적 발전, 변화하는 정치문화 下의 개혁들 간 상호작용의 場이 극히 중요했다. 1차 대전 직후의 다양한 민주화 조치들은 특히 1914년 이전에 공적 자유가 불완전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역에서 전체적으로 일종의 새로운 공론장으로 轉化했다. 공론장의 이와 같은 증강은 신흥 공화국 수립과 그에 관련된 시민권 담론, 의회제 정부의 강화, 언론 보호, 노동자 권리의 법적 확대, 노조에 대한 집단적 승인, 시민적 자유의 성장, 복지국가를 향한 사회입법의 농축과 같은 민주적 약진의 온갖 양상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왔다.

이처럼 확대되고 법으로 보호받게 된 공론장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운동은 계속해서 守勢에서 자기지시적 하위문화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론장은 민중적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하고 막대한 전략적 성취였다. 하위문화 수준에서의 자기조직은 억압 하에서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하위문화들은 연대를 구하거나 넓은 사회적 합의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反헤게모니적 요구들을 내세우거나 反민주적ㆍ反혁명적 억압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국민적ㆍ대중적 신뢰를 결여하고 있다.

반면 국가적 수준에서의 정당성과 민중문화에서의 광범위한 폭을 모두 누리는 확고한 사회적 합의를 구축할 수 있는 곳에서는 민중적 민주주의의 기초와 탄력이 아주 강할 수 있다. 1918년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런 종류의 합의가 精緻하게 구성됐다. 이 합의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열망을 경제적 재건의 논리와 결합하고 스스로를 戰後 타결의 反파시즘적 외피 속에서 조직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8년 사이에 강력한 자유주의적 공론장을 중심으로 민주적 합의가 나타나서 대중의 정치적 상상의 型板이 되었는데, 그것이 기초하고 있던 개혁의 동력은 민중이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그로부터 국가는 새롭고 지속적인 도덕적 자본의 저장소를 획득하게 됐다.

이를 예증하기 위해 戰後 영국을 살펴보겠다. 영국식 복지국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제공되는 사회보장, 의료 및 교육 분야의 입법, 누진세, 담합주의적 경제관리 등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특징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는 문화적 원천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영국인의 애국심(patriotism)은 좌경화되어서, 영국인의 자부심이라 하면 제2차 대전 이후의 평등주의, 복지국가의 성취, 그리고 노동하는 보통사람의 가치와 그들이 갖고 있는 가치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예의ㆍ관용ㆍ단합을 강조하는 민주적 전통의 복합체를 포함했다. 대중적 기억 속에서 이 애국심을 둘러싼 정당화 논변에는 노동당 정부의 수립과 보수당 정부의 정상화 정책이 相異하게 작용했지만, 또 한편으로 1970년대까지 이어진 이 합의의 안정성은 1930~1940년대의 경험들을 묶어주는 문화적 대본에 기대고 있었다.

戰後 합의는 대공황의 기억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戰時의 애국적 동지애는 희생과 사회적 배상의 사회민주주의적 서사로 재구성됐다. 1950년대의 관점에서 볼 때 1930년대의 대량실업과 굶주림은 체제의 대대적인 실패를 의미했으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회적 불행으로서 집단행동과 공적책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대전은 反파시즘적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승전에 필요했던 평등주의와 사회적 연대가 다가올 平時의 사회정책에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에도 “좋은 전쟁”이었다. 戰後 합의의 廣幅은 수사적으로 대공황과 대전의 봉합, 그리고 애국심ㆍ사회적 필요ㆍ국가이익ㆍ공공선의 결합에 기초했으며, 이것은 데니스 포터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지국가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는 영국민의 심성을 형성했다. 이처럼 민주화의 문제는 문화적 차원에서도 살펴야 한다.

사회에서 유대와 안정의 형태는 대중의 기억과 문화가 그 사회의 정치제도ㆍ국가와의 관계에서 만들어낸 동일시의 형태에 달려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양차대전 직후 시기는 제헌의 국면으로서 핵심적인 순간들이었다. 두 시기 모두 사회적 동원이 대규모였고 제도변화는 급진적이었으며 민중적 희망이 거세게 몰아쳤다. 이것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대약진을 가능케 할 만큼 기존체제에 큰 타격을 줬다. 그러나 戰間期의 정치적 양극화와 파시즘의 대두를 놓고 볼 때, 1918년의 신흥 공화국들보다 1945년 이후 서유럽의 합의가 戰後 사회적ㆍ정치적 질서에 대한 더 고밀도ㆍ고탄력의 민중적 지지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後者는 전쟁과 대공황의 기억에 기대어 20년 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자본주의적 재건, 장기호황, 소비자의 번영이 정치지형을 서서히 바꿨다. 1960년대의 젊은 세대는 戰後 개혁 혜택의 반복적 원용을 자기위안으로 치부했다. 더욱이 세대갈등은 부모세대 스스로가 좌익이면서 현재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힘들었던 지난 시절의 협박”을 동원하고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경우에 더욱 악화됐다.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가 역사를 독점하고 그로써 젊은 세대를 협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전 세대는 젊은 세대가 물질적 성취를 “자유”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더 급진적인 형태의 투쟁을 호소함으로써 反파시즘 투쟁과 노동계급 좌파의 정치 전체를 의문시한다고 느꼈다. 이전 세대에게 제2차 대전은 결정적인 경험이었다. 나치 점령지에서,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저항운동의 反파시즘 유산이 재건의 개혁주의 언어와 강력하게 결합되어서, 1960년대의 번영이야말로 해방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1950년대의 모진 상황을 채 벗어나지 못했던 이탈리아에서는 생활수준의 개선이 더 큰 감정적 힘을 획득했다. 1950년대에 사회주의의 像이란 모두가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1968년과 달리, 인간–기계 관계나 소외는 주요 논점이 아니었다. 나치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영국에서도 복지국가와 戰時 집단주의가 유사한 효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와 여성>

민주주의의 경계 확장 및 축소를 논할 때는, 특히 접근권의 규제를 논하거나 누구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반영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경우에는 시민권과 性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 이래로 근대의 사회적ㆍ정치적 용어들은 남성과 여성의 뚜렷한 二項구분에 의존했다. 시민사회의 기본 범주는 性差를 구성하고 그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여성을 배제했다. 이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寫像되어서, 여성을 일차적으로 어머니이자 가계관리자의 자리에 놓았다. 더욱이 여성 투표권 문제는 언제나 무능력과 배제라는 더 큰 담론에 의해 과잉결정되어 온 만큼, 시민권의 의미를 심원하게 뒤흔들면서 국가 개념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지 않고서는 여성이 시민권의 원 안으로 남성과 평등한 입장에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최초로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구체적인 여성주의 운동 양자가 남성의 투표권 독점에 함께 도전했다. 1914~1923년에는 제1차 대전으로 인한 가족생활의 정치화와 전시경제의 여성동원이 기존 性差 체제의 동요를 초래했지만, 終戰과 함께 再정상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再정상화는 고르지 못하고 불완전했으며, 그에 대한 이의도 제기되었다. 백화점과 영화로 상징되는 소비문화 및 오락문화가 여성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켰다. 동시에 공론장에서도 여성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여기서 서로 대항하는 두 논리가 존재했다.

첫 번째 논리는 여성을 母性에 결부시키는 것이었다. 제1차 대전 이전에도 모성에 대한 사회적 이상들은 존재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투표권 획득과 헌법상 권리의 확대를 우선시했다. 그러나 戰後에는 여성 시민권이 점차 조국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기여를 중심으로 개념화됐다. 전시경제가 여성을 노동현장으로 불러들였음에도 여성은 노동자로서가 아닌 어머니로서, 그리고 공적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가족과 사생활의 母性으로서만 시민권의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도록 허용됐다.

두 번째 논리는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고 정치적 권리를 얻는 것이 위험과 무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회적 공포였다. 1920년대의 온갖 매체들은 신세대 여성에게 새로운 표현의 場을 제공했다. 신세대 여성은 그들의 어머니처럼 가족의 관점에서도 정의되지 않고 아버지나 남자형제들처럼 일의 관점에서도 정의되지 않았다. 그들은 기계시대의 여성이었고, 그들에게 기계란 일자리, 소비재, 근대성, 개인성, 즐거움을 의미했다. 더욱이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젊은 여성을 겉치장에나 신경 쓰는 계급의 배신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경멸적인 어조로 “예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성들”의 “파괴적인” 오락을 언급했으며, 점원, 미용원, 타자수, 조립라인 노동자, 청소부로 일하는 젊은 세대 노동여성에게 정치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上記 두 논리 모두에서 성별간 관계에 대한 논쟁의 기초가 정치적 권리의 문제로부터 도덕적 질서의 관념으로 옮겨갔고, 이는 시민권의 정치적 상상에 심원한 결과를 초래했다.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사고방식은 戰間期에 여성이 정치담론에 입장한 방식을 쉽사리 포섭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모성복지, 아동복지, 피임 및 낙태, 우생학적 사회공학, 공공보건 및 위생, 청소년 통제정책, 도덕과 성에 대한 일반적 규제를 중심으로 “신체정치” 혹은 “생물학적 정치”의 영역이 구체화됐다. 다른 한편 떠오르는 대중소비문화가 새로운 정체성들을 전시했다. 영국의 보수주의와 이탈리아 및 제3제국의 파시즘처럼 相異한 戰間期 우파들은 신체의 정치와 소비의 정치라는 이 쌍둥이 영역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이런 양상은 제2차 대전 이후에도 반복됐다. 1945년 이후의 여성 투표권 보급도 기존의 性 체제를 흔들지 못했다. 여성은 비록 투표권을 얻었지만,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가족의 영역에 머물러야 했다. 유럽의 복지입법의 본질에는 한 식구를 모두 먹여 살리는 남성과 그가 받는 “가족 임금”이라는 관념이 기입되어 있었다. 특히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와 같은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公私ㆍ男女 이분법이 놀라우리만큼 고수되어서, 1945~1946년에야 완전한 참정권을 얻게 된 여성은 더 넓은 공공정책의 場에서 여전히 같은 지위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생산적 고용이라는 낡은 만병통치약을 들먹였지만, 노동조합은 여성배제ㆍ가족임금ㆍ불평등보수를 계속 고집했다. 여성은 민주국가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인정됐지만, 더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여성에 대한 인정이 거의 전적으로 가족형태에 포섭됐다.

그러므로 20세기의 민주화 과정은 여성의 입장에서 극도의 모순을 내포했다. 양차대전의 전시동원은 여성을 가정으로부터 끌고 나왔는데, 終戰 후의 평등한 시민권이라는 암묵적 약속이 이 과정을 자극했다. 그러나 1918년과 1945년에 법률적 시민권 너머에서 여성은 다시 사적 영역과 가정의 종속적 형태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복지국가의 긍정적 가치들조차 모성주의적 틀을 통해 여성의 활동을 가내로 제한했다. 복지국가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성취들은 여성을 가내의 의존적 위치에 놓았고, 사회적 시민권의 언어는 여성을 우대했으나 해방시키지는 않았다. 냉전기에도 반공적ㆍ애국적 감정은 가족과 가정이라는 수사에 이끌려서 이상화된 가족의 像을 위협받는 국가안보와 삶의 방식에 결부시켰다. 이 견고한 性的 구획 체계 하에서 여성은 주로 어머니로서 구성된 반면 남성은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공적 책임의 담지자로서 구성됐고, 이것이 戰後 민주주의 문화를 지배했다.

<결론>

性差의 관점에서 전개한 논의를 이쯤에서 끝내면서 그 이유를 들자면, 먼저 민주화는 가구의 문턱에서 정지함으로써 가족의 기존 내부 질서를 손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뒤틀리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공적 시민권을 부여했다. 두 번째로 女權의 성취는 오직 그와 같은 광범위한 혁명적 국면에서만 일어났다. 세 번째로 민주적 변화란 未完의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당시 여성에게 편파적인 성취의 배분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편 이것은 뒤이은 1968년 汎유럽적 위기의 급진주의에서 핵심적이었던 요소들을 시사한다. 소외담론, 공동체 정치에 맞춘 노동시장 재구조화, 직접행동과 소규모 참여민주주의 형태 등 1968년이 배출한 광범위한 비판은 신여성운동, 가족에 대한 문제제기, 새로운 性정치, 개인의 삶의 정치화와 같이 20세기 후반에 대두한 정치적 특징들에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 때부터 여성운동가들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뒤집었고, 일상성과 공적ㆍ정치적 삶의 연결은 완전히 새롭게 짜여졌다. 이처럼 1968년 이후 기존 정치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은 이론 차원에서건 실천 차원에서건 민주주의를 전통적인 정치사를 지배했던 좁은 법적 정의로 제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또 오늘날처럼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시장의 교의로 축소시키는 것은 보수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의 몰락 이래로 우세를 점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정의는 자유시장과 개인의 권리를 고수하면서 정당한 정치행동의 범위를 사회적 행정, 의회의 절차주의, 法治라는 제한된 영역 내로 한정한다. 동시에 정치에서 그것 이상을 바라는 것은 정치영역의 현실적이고 허용 가능한 한계를 초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혁명사와 프랑스혁명사 전문가들도 유사하게 정치가 고유한 적정 한계를 이탈하면 폭력ㆍ급진주의ㆍ공포정치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대두한다고 주장해왔다. 정치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던 1970~1980년대에 이와 같은 혁명해석이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1917~1923년과 1945~1949년의 戰後 타결을 혁명적 국면으로서 비교연구함으로써 좀 더 복합적인 이해를 시도했다. 민주주의의 실제(actuality)라는 맥락에서, 바로 초과ㆍ과잉(excess)의 순간이, 다시 말해 격심한 사회경제적 갈등이 발생하고 정부가 무너지고 사회 전체가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 결정적 성취를 낳았다. 민주화는 외관상의 형태에서뿐 아니라 대립의 논리로서도 폭력적이었다. 절차주의와 합의조성이라는 옛 정치 기제들이 모두 와해됐다. 잠재적인 것이건 실현된 것이건 뒤이은 민주주의의 성취는 항상 그러한 위기들을 전제했다. 1989년, 1968년, 그리고 다른 제한적 사례로서 1956년의 헝가리와 폴란드, 1975년의 포르투갈, 1970년대 중반의 에스파냐, 1980~1981년의 폴란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20세기 후반 민주적 약진의 순간에는 언제나 거리의 요구와 목소리가 각국의 의회와 위원회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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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Bensaïd, "Revolutions: Great and Still and Silent,"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새로운 의미론에 각인되었다. 즉 이제 과거…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프랑스혁명부르주아혁명이 아니었는가? - 역사서술의 유산 -

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