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헨리 헬러,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장기 지속> 요약-번역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장기 지속 (요약-번역)

헨리 헬러

Henry Heller, "The Longue Durée of the French Bourgeoisie," Historical Materialism: Research in Critical Marxist Theory, 17:1 (2009), pp. 31-59.


원문: http://booksandjournals.brillonline.com/content/journals/10.1163/156920609x399209

이 글에 대한 반박과 재반박 등으로 구성된 논쟁
William Beik's response - http://booksandjournals.brillonline.com/content/journals/10.1163/156920610x512462
David Parker's response - http://booksandjournals.brillonline.com/content/journals/10.1163/156920610x512471
Henry Heller's response to William Beik and David Parker - http://booksandjournals.brillonline.com/content/journals/10.1163/156920610x512480


초록 :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엥겔스 이후로 프랑스 절대왕정을 귀족과 새로 출현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 사이의 중재자로 보았다. 좀 더 최근의 마르크스주의적 서술들은 절대왕정이 귀족의 이익을 반영했다고 강조한다. 수정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이 시각을 극단적으로 이끌고 가서, 부르봉 왕조의 절정기였던 17세기에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역사가들은 그런 견해를 취함으로써 근대 초기에 지대세력과 이윤세력 사이에 변증법적 대립이 진행 중이었다는 것을 무시했고, 그 결과 구체제와 1789년 혁명을 단절시켜버렸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출현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지대세력의 전진과 절대왕정의 공고화에 의해 방어적인 위치로 내몰렸지만, 그래도 17세기를 통과해서 살아남았고, 이어지는 계몽주의 시대에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핵심어: 절대왕정, 구체제, 부르주아지, 귀족, 이윤, 지대, 마르크스주의적 수정주의, 본원적 축적)

---

영어권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인 바이크, 파커, 브레너는 근대 초 구체제 프랑스가 봉건제와 절대주의의 속박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 결과로 그들은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혁명이었다는 관점을 거부하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강화시켜왔다. 이들 학자들은 구체제 프랑스에서의 봉건적 생산관계의 지배력을 과장하다보니 부르주아지의 존재와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지워버리는 데에 이르렀다. 이 글에서는 16세기 프랑스에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나타나서 17세기에도 지속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 1789년의 혁명을 이끌면서 공세로 돌아섰다는 관점을 재확립하고자 한다.

<17세기 프랑스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거부>

바이크는 17세기 프랑스가 기껏해야 느린 경제성장만을 경험했다는 잘 알려진 사실에서 출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린다. 농업 이윤이 높았던 16세기와는 달리, 17세기는 높은 지대와 억압적인 과세의 시기였고, 도시와 시골의 기업활동에 불리하고 귀족과 관료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으며, 자금은 생산부문에서 금융부문으로 이동했다. 랑그독에서 곡물 및 포도주 거래업자, 의류상, 견직물 취급업자, 농촌 산업가와 같은 부르주아지가 살짝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정치적 조무래기일 뿐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적ㆍ정치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부재했으며, 그 취약성으로 인해 특권 귀족과 지주의 지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토지에 기초한 지배계급은 왕정과 경쟁하기보다는 협력하면서 루이 14세가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독점적 권력을 행사했다. 여기까지가 바이크의 견해다.

이것은 절대왕정이 귀족에 의해서도 부르주아지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 경쟁하는 신분들 상위에서 독립적인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는 롤랑 무니에의 관점에 대한 도전이다. 바이크는 17세기 절대주의가 귀족계급의 입장을 구현하는 구조조정된 봉건사회였다고 보며, 왕정과 귀족이 대립했다고 본 무니에와는 반대로 그 둘이 서로를 강화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바이크는 절대왕정이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고 본 엥겔스의 견해를 거부했다. 엥겔스는 농노제가 사실상 소멸하면서 소상품 생산과 본원적 축적의 시기가 시작되어 초기 자본주의의 출현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바이크는 잉글랜드에는 그런 시각이 적절하지만 지주와 종속적인 농민들의 사회가 몇 세기 동안 이어진 프랑스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바이크는 이로부터 두 소비에트 학자들, 포르슈네프와 루블린스카야를 비판했다. 포르슈네프는 17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모순되는 행동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즉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가 독립적이고 때때로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행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약한 발전정도로 인해 궁극적으로 봉건적 귀족제도에 포섭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지는 정치적으로는 관직매매를 통해, 사회적으로는 귀족호칭 취득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징세청부, 국가재정에의 개입, 중상주의적 특권에 대한 의존을 통해 이 체제에 편입되었다.

포르슈네프는 부르주아지 계급이 굴종과 저항 사이에서 전형적인 변증법적 관계에 처해 있었다고 보았던 반면, 바이크는 부르주아지가 경제적ㆍ정치적으로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이크는 부르주아지의 상대적 취약성은 인정하지만 경제적 독립이나 이따금 발생하는 반항과 같은 관념은 거부하면서, 포르슈네프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독립성과 역량을 뒷받침할 증거를 거의 제시하지 못하며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도 겨우 프롱드 난 기간의 혁명적 행동을 들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바이크는 루블린스카야가 부르주아지의 혁명적인 정치적ㆍ사회적 입장이라는 포르슈네프의 관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포르슈네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독립성을 주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왕실 관리들과 재정관들은 봉건화되었지만, 그들과는 별개로 경제적으로 활동적인 계급이었던 상업ㆍ산업 부르주아지가 존재했으며, 그들은 자본축적의 잠재력을 보호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절대주의를 필요로 했다. 이 계급은 지리적으로 분화되고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완전히 발전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다만 아직 그들의 이해관계가 봉건제와 양립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은 채였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국가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부상으로 향하는 길을 예비하도록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바이크는 이런 상업ㆍ산업 부르주아지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루블린스카야가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 집단의 중요성을 정황증거만으로 강조했다고 비판한다. 바이크는 17세기 부르주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그는 파커의 연구를 근거로 제시한다. 파커는 라 로셸에서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독립적인 부르주아지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파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영주의 토지 지배와 귀족의 국가기구 통제로 인해 구체제 말기까지 프랑스 사회의 귀족지배가 공고하게 이어졌다.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귀족의 통제뿐만 아니라 절대적 소유권의 부재, 기생적이고 숨 막히는 관료제와 과세체계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 농촌 부르주아지도 도시 부르주아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과 비교해보면, 프랑스에는 자본주의를 위한 정치적ㆍ법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파커는 연구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들에 도달한다.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유래한 부르주아 혁명 개념, 즉 봉건제의 태내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해서 결국 권력을 쟁취했다는 개념은 큰 수정을 요한다. 17세기 영국과 비교했을 때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식별해내기 힘들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는 미약했는데, 이는 프랑스혁명 전야까지 이어졌다. 파커의 주장은 불가피하게 1789년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프랑스혁명의 수정주의적 시각이라고 불리는 것과 꼭 들어맞는다.

이제껏 자유주의 역사가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모두 공통적으로 프랑스 구체제의 특징적인 면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부르주아지의 대두라고 전제해왔다. 그런데 바이크와 파커의 견해는 구체제에서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중이었다는 관념을 기각하는 데 이른다. 바이크는 단순상품생산 또는 본원적 축적과 같은 관념을 17세기 이전의 프랑스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태동하는 자본주의 및 부르주아지라는 관념을 명시적으로 기각한다.

<지대와 이윤의 변증법>

브레너는 영국사의 관점에서 프랑스를 검토하면서 바이크와 파커의 견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그의 핵심 논지는 자본주의의 기원이 농촌에 있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를 영국과 대조적인 실패사례로서 부각시켰다. 프랑스는 중세 후기에 영국 같은 계급투쟁을 경험했지만, 농민층이 보유한 재산의 비중이 더 컸던 결과로 영국과 같은 농업의 구조조정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볼 때 프랑스에서는 산업ㆍ상업 부르주아지의 부재보다도 농촌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의 부족이 문제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상이한 재산분배와 대조적 생산관계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규준이 된 前者와 실패한 반례로서의 後者를 나누게 되었다. 그에게서 프랑스는 바로 他者다.

그렇다면 바이크와 파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혁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브레너의 논지는 프랑스 구체제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혁명 개념은 외견상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은 영국혁명과 프랑스혁명 양자 모두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혁명이라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바이크, 파커, 브레너의 견해는 수정주의와 들어맞는다. 1980년대에 이르러 우세하게 된 수정주의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혁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공격했다.

프랑스를 귀족이 절대주의 국가를 통해 농민을 지배한 사회라고 보는 관점에 기본적 차원에서는 동의할 수 있다. 바이크와 파커가 비록 부르주아지의 무기력함을 과장하기는 했지만, 부르주아지 상층이 계속해서 국가 정치기구로 흡수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옳다. 또 몇몇 산업 및 상업 이윤들이 상업적 특권, 관직매매, 세금징수, 지대(rentes)의 구매, 그리고 귀족화를 통해 변형되었고, 구체제가 의존하고 있던 농업 잉여는 이러한 유사상업적 과정 속에서 용해되어 버렸다.

이 견지에서 바이크와 파커는, 부르주아지를 귀족에 대한 굴종과 저항 사이에 낀 계급으로 묘사했던 포르슈네프와 반대로, 부르주아지의 힘과 호전성을 애써 부인하려 한다. 그들은 너무 멀리 나아가서 부르주아지와 귀족 간에 계급 간 대립ㆍ갈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17세기 부르주아지와 귀족 사이에 계급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바이크와 파커는 계급투쟁을 무시함으로써 17세기 프랑스로부터 역동적 발전의 의미를 박탈했다. 그들의 주장은 17세기를 그 후와, 특히 1789년의 혁명과 어떠한 관계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그들의 견해는 역사적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

계급 관계에 대한 바이크의 분석은 프랑스 농촌 경제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주로 라뒤리의 저술에 의존하는데, 동시에 라뒤리의 전체적인 입장을 誤讀하고 있다. 그는 16세기가 농업적 이윤이 매우 높고 “중간규모에서 대규모 기업농에게 유리했던” 시기였던 반면, 17세기는 점점 더 높아지는 지대와 억압적인 과세의 시기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라뒤리를 인용하면서 인구압박과 토지소유욕이 지대 상승에 기여했다고 주장하지만, 지대 상승을 시장의 작용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라뒤리는 지대 상승은 국가의 증세와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윤 하락과 지대 상승은 물신화된 경제학적 개념들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라뒤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새로운 정치적ㆍ사회적 질서를 부과하려는 투쟁의 결과를 나타내는 경제적 은유로 이해해야 한다.

바이크에 따르면 지대는 17세기 내내 농촌 잉여생산의 유일한 형태였고, 농촌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세기처럼 봉건적 지대만이 존재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바이크는 라뒤리를 따라 지대가 단계적으로 높아졌다고 타당하게 결론내렸으나 16~17세기에 지대가 이윤 및 임금과 어떤 상호관계에 있었는가에 대한 라뒤리의 암시들을 놓쳤다. 라뒤리는 농촌에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계급이 계속 존재했음을 전제하고서, 그들이 루이 13세와 마자랭 치하 17세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프랑스 농민의 대다수는 자급자족적 소농이었다. 그러나 라뒤리가 주목했고 16세기에 등장한 농촌 자본가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불균형적으로 넓은 경작지를 소유ㆍ임대했고, 자신의 자본과 임노동을 이용해서 그것을 일궜으며, 여기서 모인 자본주의적 지대는 이 기간 전체에 걸쳐 농촌의 잉여에 본질적 요소였다.

바이크가 라뒤리의 지대와 이윤의 변증법을 誤讀한 것은 17세기에 대한 근본적 곡해로 이어졌다. 바이크의 견지에서 지대의 승리는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때 이윤이 소멸했고, 부르주아지의 사회적ㆍ정치적 소멸이 뒤따랐다. 라뒤리의 설명은 더 점진적이고 변증법적이다. 바이크가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지대의 승리를 주장한 반면 라뒤리는 장기에 걸친 투쟁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16세기 대부분에 걸쳐 지대에 대한 이윤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 경향이 1580년 또는 1600년에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것은 경향의 반전일 뿐 결정적 승리는 아니었으므로, 17세기 전반은 이윤에 대한 지대의 길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장기투쟁 기간 중 지대와 조세가 이윤을 압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루이 14세의 통치기 뿐이었다.

바이크는 민중봉기의 계급적 기반을 부정하고 파커는 모순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윤에 대한 지대의 공격은 설사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도전이 없었더라도 위로부터의 강력하고 계속되는 계급적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무엇보다 점증하는 지대와 조세가 이윤에 대해 끈질기게 압박을 가하는 형태를 취했다.

바이크와 파커는 지대의 승리가 17세기를 전부 결정했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고정된 지대와 같은 주어진 조건보다 지대가 상승하고 이윤이 점진적으로 침식되는 과정이 중요했다. 라뒤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표현했다. “16세기의 확장은 기업의 이윤에 유리한 것이었다. 17세기에도 이윤이 지속되었으나 지대도 공존했고, 이윤에서 발생한 잉여 가치가 지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비록 계속해서 더 높아지는 지대의 부담을 짊어지고는 있었지만, 농촌 자본주의자 계급은 남아있었다. 계급투쟁은 계속되었는데, 주도권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었다. 게다가 이 공격은 폭력적인 사회적 대립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대 상승은 물론이요, 국가 건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적 계서제, 상층계급 예의범절의 복잡화,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하층 계급의 사회적ㆍ종교적 훈육의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농촌 부르주아지는 완전히 분쇄되지 않았으며, 힘을 되찾아 18세기에 재등장했다. 라뒤리도 이러한 지속성을 강조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어디로?>

바이크와 파커는 부르주아지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면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 엥겔스는 소상품생산과 본원적 축적의 시기가 자본주의의 기원이라고 보았는데, 바이크는 그것이 잉글랜드에서는 의미 있는 이야기지만 프랑스에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록 농노제가 쇠퇴했지만, 본원적 축적은커녕 소상품 생산의 시기도 없었다는 것이다. 바이크는 프랑스에서 원시자본주의적 혹은 자본주의적 활동의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모순적이게도 16세기 농촌에서 중간규모에서 대규모의 이윤추구 농민들이 주도적이었다는 라뒤리의 견해는 인정한다.

바이크가 소상품 생산과 본원적 축적의 시작 시기를 부정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브레너도 이 단계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대등한 발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프랑스는 1450~1520년경에 중세 말 위기로부터 경제적으로 회복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단순상품생산이 지배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시장과 시장거래가 급증했다. 대상인들은 활동적이었지만 아직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조세와 지대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 결과 농촌과 도시의 소규모 생산자들이 중요한 거래주체가 되어 번영했다. 뒤이은 1520-60년의 기간 동안 리옹에 집중된 상인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는 명백한 승리를 구가했고, 이 때 농촌에서는 커다란 이윤의 가능성이 농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발하였다. 농촌인구는 점차 임금에 의존하는 생산자 집단과 일종의 부르주아지로 구분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바이크의 견해와는 달리 본원적 축적은 이 과정에 필요하고 불가분의 양상이었다.

물론 당시 농업 자본주의는 미숙했고 불완전했다. 중간 농민층의 계속되는 압력, 영주의 지배와 공동체 권리의 지속, 관료제적 국가의 공고화, 그리고 농촌의 일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종의 정신적 관성과 아뷔튀스(habitus)가 막 태동한 농촌 자본주의를 억제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종교전쟁기에 농촌지역에서 힘을 키웠다. 16세기 전반에 시작됐던 농민의 토지 박탈이 가속화되었다. 강탈, 重稅, 부채가 부농과 도시 부자들에게 토지를 가열차게 집중시켰다. 이것은 17세기에도 이어져서 임금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여기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이 과정이 끝날 무렵 농민에게는 토지의 50%만이 남겨졌고, 지역에 따라 이 수치는 1/3까지도 내려갔다. 토지를 잃은 농민이 점차 임금에 크게 의존하게 되면서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졌다. 이에 발맞추어 16세기 후반부에는 각종 농업기술의 발달이 동반되었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프랑스 북부의 농민 대부분은 명백하게 귀족과 부르주아지 양편의 압박으로 방어적인 위치에 내몰렸다. 즉 소농의 희생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부르주아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非귀족 평민층 사이에서 재산 재분배가 일어났다. 뒤이은 17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부분적으로 농업 자본주의가 뿌리내렸다. 그런데 파커는 소유권의 대대적인 이전이라는 당시 자본주의적 발전의 含意를 평가절하 한다. 농촌사회에서는 경제적 진보와 퇴보가 공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역사가는 자본주의를 지연시키는 요소들과 조성하는 요소들 사이에서 시각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파커는 자본주의 발전을 억제했던 요소들만을 강조하고 그 반대를 최소화한다. 그는 소유권 이전에 대한 봉건적 제약이 계속되었고 절대적 소유권에 대한 명시적 인정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구체제에 절대적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는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 자본주의가 취약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이 같은 절대적 소유권은 명예혁명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자본주의는 분명히 그 보다 200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재산의 관리ㆍ판매ㆍ획득에 대한 봉건적 권리들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농민은 사실상 원하는 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있었다. 파커가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한 것은 그것이 만약 1500-1640년의 기간에 국한된 것이라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1640년 이후에는 본질적으로 비교 불가능한 두 사회를 비교한 것이다. 영국은 청교도혁명과 크롬웰 통치를 겪으면서 전반적으로 절대왕정과 귀족 영주로부터 해방되었고,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제약 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다시 공고해졌기에 자본주의는 고작 구체제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발전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더 적절한 비교는 아마도 프랑스와 도쿠가와 막부 하의 일본 사이에서 가능할 것인데, 두 경우 모두 이제 태동하는 자본주의가 강력한 영주제 체제의 틈바구니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16세기 프랑스에서의 본원적 축적>

16세기 프랑스 농촌 자본주의의 발전은 성장하는 상업ㆍ제조업 계급의 활동을 지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도시를 거점으로 한 대상인들과 상인 제조업자들은 16세기 전반에 번영을 구가했다. 기존 산업이 증가했고, 유리, 리본, 레이스 제조와 같은 새로운 제조업이 등장했다. 앙리 4세의 즉위와 함께 회복이 시작되어 162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주요 기반시설 계획, 보호관세, 그리고 제조업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보조는 상업과 제조업의 회복을 도왔다.

이윤의 공세와 본원적 축적은 종교전쟁 기간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대규모의 농촌 파괴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은 중간계급을 강하게 만들었고, 도시 부르주아는 농촌의 재산을 사들이거나 되팔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밖에도 여러 사실을 통해 종교전쟁 말기와 17세기의 시작점에서 중간계급이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처럼 증대한 중간계급의 역량은 그들의 호전성을 설명해준다. 농촌연맹(rural leagues)의 시기와 1570~90년대에 부르주아지의 증가하는 주장과 반란이 귀족을 위협했고 영주제적 반동을 유발시켰는데, 농촌연맹의 역량과 조직은 부농과 소도시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농촌 중간계급의 성장하는 비중에 기반을 두고 등장했다.

콩스탕이 쓴 농촌연맹에 관한 최근 저작은 이 정치적ㆍ종교적 운동이 대부분 도시적ㆍ부르주아적 기반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단지 소수의 귀족만이 여기에 참여했고, 연맹의 귀족 지도자들이 연맹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려 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연맹은 일관된 정치적 강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특히 1588년 블루아 삼부회의 제3신분 요구사항에 구현되어 있었다. 이 불만에는 프랑스 중간계급의 활동을 지배하고 옥죄는 것으로 간주됐던 이탈리아 대상인들과 재정관들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었다. 제3신분은 이를 넘어 왕정의 헌법적 제한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이처럼 과격한 정치적 요구사항은 제1신분과 제2신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관직 매매, 중상주의 계획의 정교화, 프랑스 재정관 지위에서 이탈리아 인의 배제와 같은 것들이 앙리 4세 치기에 부르주아지의 공격성을 일시적으로 잠재웠으나, 그의 통치가 끝나자 부르주아 급진주의는 다시금 쇄도했으며, 더욱이 1614년의 삼부회는 제3신분과 제2신분간의 격렬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같은 해에 라 로쉘의 도시 과두정이 무너지고 더 민주적인 코뮨이 새로이 수립되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도 파커는 부르주아지가 중요한 요소로서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보며, 그에게서 이 반란은 자영업자와 장인들의 일일 뿐이다. 로빈스는 “파커는 1614년의 사건을 단지 지나가는 일로 언급했고, 그 사회적 기원이나 저항의 과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전혀 제공해주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면서, 프티 부르주아지가 그 운동의 대중적 기반이었지만 지도자 중에는 도매업자들과 국제무역상들이 포함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기존 과두통치세력보다도 부유했다고 썼다.


<시련을 견뎌낸 부르주아지의 존속>

위그노가 장악했던 라 로쉘에서 일어났으며 대상인들이 주도한 봉기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신교도의 역할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바이크와 파커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미국 경제사학자 스코빌은 위그노의 경제적 추방에 대한 그의 저술에서 낭트칙령의 폐지에 따른 위그노의 망명이 프랑스 경제에 그리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경제가 어려웠던 것은 주로 전쟁 및 다른 경제동향 때문이었 부정적인 경제적 경향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위그노 20만 명 정도가 프랑스를 떠났지만 60만 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스코빌의 저서에는 17세기 프랑스 경제의 제조업ㆍ상업 부문에 대한 조사결과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집중된 수공업을 포함하는 수 백 개의 공장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제조업 부문의 발견이 중요하다. 많은 도시에서 이를 주도한 것은 신교도 중간계급이었으며, 위그노 장인, 위그노 공직자, 위그노 귀족, 그리고 심지어 위그노 농민도 존재했다. 17세기의 위그노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 한 것은 상업과 제조업 분야에서의 과잉대표 현상(over-representation)이다. 이 기업가들은 프랑스 남부의 제한된 시장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소금, 곡물, 파스텔, 의류를 제네바와 그 너머에까지 수출하였다. 마르세유 항을 통해서, 프랑스와 제네바의 대상들은 환대서양 지역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중요한 국제적 연결망을 구축했고, 망명한 이들도 프랑스 내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위그노 디아스포라와의 이와 같은 관계는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들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에 머물렀던 위그노들은 콜베르 시기와 18세기 프랑스 경제의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제네바는 일종의 자유무역지대가 되어서 17세기 말과 18세기에 프랑스 경제를 생동ㆍ변화시켰다.

물론 17세기 프랑스의 대상인과 제조업자가 전부 위그노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이크ㆍ파커의 주장과 달리 위그노가 구교도와 함께 도시 중간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바이크와 파커는 17세기 초 커져가는 부르주아지의 힘의 초기 국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 들지도 않는다. 앙리 4세 통치기에 농업적 이윤의 공세가 끝나고 지대에 유리한 새로운 조류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전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 기간에 시작되었을 뿐이고, 긴 기간의 과정을 거쳐 루이 14세의 통치기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지대의 공세는 최소한 그 이전 시기 이윤의 공세만큼이나 장기에 걸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경향은 단지 시장의 작용에 대한 반응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비경제적 요인들이 최소한 수요ㆍ공급 관계만큼 중요했다. 새로운 사회적ㆍ정치적 환경이 지대를 고취시키고 이윤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종교전쟁기에 약화되었던 국왕-귀족 동맹이 리슐리외에 이르러 견고하게 재확립되었다.

관직매매와 국가기구의 규모가 계속 확대되면서 지대에 유리한 환경이 강화되었다. 군사력 증강(총 5만 군사)은 국가권력 확장의 정점을 장식했다. 가톨릭 교회의 영적 회복과 신교도에 대한 견제 또한 사회적ㆍ정치적 질서를 강화시켰다. 이 모든 요소들은 증세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다시 지주들이 지대를 높일 수 있도록 하여 지주층을 강화했다. 동시에 관직 수 증가와 국가를 향한 자본전환은 부르주아 상층부가 권력에 통합되도록 이끌었다. 이는 전체적으로 위로부터의 정치적ㆍ사회적 반동 또는 계급전쟁의 형태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17세기 프랑스사의 주된 특징이다.

포르슈네프는 17세기 여러 민중봉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참여가 권력에 대한 충성과 반란 사이를 오가는 부르주아지의 다소 정신분열적 태도를 수반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바이크와 파커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애써 부인했는데, 그들의 주장은 틀린 점보다는 옳은 점이 더 많았다.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분명 후퇴 중이었고, 그들 중 가장 앞선 자들은 국가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바이크와 파커는 이것을 너무 과장했다. 높은 세금을 이유로 봉기한 소농ㆍ장인ㆍ노동자 사이에서 이윤에 대한 압박의 결과로 봉기했던 몇몇 부농과 대상인이 분명히 존재했다. 어쨌든 17세기 민중반란에 부르주아지가 개입되었는지 아닌지로 갑론을박하는데, 당시 계급투쟁의 존재 여부는 여기에 달려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며, 이윤추구적 기업가들은 반란에 참여했건 안했건 이 전쟁의 희생자였다.

루이 14세 통치기에 고율의 세금과 지대로 인해 기업적 자영농과 차지농의 재산은 최하점을 찍었고, 많은 수는 파산했지만, 일부는 분명히 살아남았다. 그 예로, 모리소는 16세기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일-드-프랑스의 大차지농층의 궤적을 추적했는데, 루이 14세 말기는 그들에게 특히 힘든 시기였지만, 그들은 전체적으로 살아남았다. 가족적 유대와 행동의 합리화는 다음 세기에 그들이 번영하고 힘을 확장하는 길을 예비하면서 그들이 이윤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지대와 조세의 상승이라는 끈질긴 압박에 대한 반응으로서 행해졌다. 그들이 도입한 주목할 만한 개선으로는 성공적인 토지재산 병합, 전문화, 비료 개선, 향상된 마구와 축력을 통한 견인력의 강화가 있는데, 이는 브레너가 잉글랜드 농민들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했던 부분과 비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튀르고는 북부 프랑스 지역의 대농장 임대가격은 관습적으로 자본주의적인 농민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르마르샹과 아도의 최근 저서도 18세기 농업 자본주의가 17세기를 버텨온 농촌 자본가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16세기 자본주의를 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농촌 자본가 계급 곁에서 중요한 대상인과 제조업자 계급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그들은 맞바람에도 불구하고 종교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앙리 4세의 통치기에 새로 활력을 되찾아 떠올랐다. 그들의 번영은 1620년대까지 이어진 농촌 부르주아지의 번영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바이크와 파커는 16세기~17세기 초의 이런 현상을 대체로 무시하며, 바이크는 파커의 연구에 의존해서 17세기 프랑스 어디서도 의미 있는 상업ㆍ산업 부르주아지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파커는 상업이 제조업을 포섭했고 부르주아지가 분열되고 봉건화되어 국가로 통합되었다고 강조했다. 살펴본 것처럼 바이크는 랑그독에서 경제적ㆍ정치적으로 거의 의미 없는 소규모 상인과 제조업자로 구성된 숨어있는 부르주아지만을 인정하며, 이로부터 금융엘리트로부터 독립적인 상업ㆍ제조업 계급이라는 관념을 평가절하 한다. 파커의 경우는 17세기와 18세기 이 소집단에 대해 제대로 논하지도 않았다. 파커와 바이크의 논리대로라면, 16세기에 형성돼 독립적인 상업ㆍ제조업 계급을 지탱한 상업ㆍ제조업 기반이 17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계급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탱은 다른 견해를 보여주는데, 그는 대상인들이 금융업에 동화되고 관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요 도시들에 독립적인 대상인 계층이 계속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이 계층을 중상주의적 정책이나 왕실 재정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경향에는 문제가 있다. 17세기 전반에 사용된 ‘대상인’이라는 말에 대한 어원학적 분석은 그들을 구분된 사회적 요소로 보는 시각을 지지해준다. 또 그들이 비록 금융업에 깊숙이 관여했고 귀족지위를 매입하려 들었으며 왕실에 대출을 해주기도 했지만, 금융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이러한 비경제적인 투자에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없다. 국제적 상거래에 종사하는 한, 은행업을 겸하는 것이 장부 정리와 상업환어음 할인 등의 업무에 유용했다.

상업 활동의 전반적인 수준에 관하여, 푸수는 17세기 프랑스 상업에 대한 연구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베네딕트는 17세기에 전반적으로 도시가 놀라울 만큼 부유해졌다는 것과 여기에 대상인들이 분명히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17세기 프랑스의 대도시들이 생각보다 더 역동적인 경제성장과 변화의 중심지였다는 결론을 내린다.

바이크는 저서 말미에서 랑그독에서 상당한 정도의 직물산업이 존재했고 그것이 1650년 이전까지는 성공적이었고 40년 간 쇠퇴한 후 1690년부터 회복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중간의 쇠퇴기만을 강조한다. 그는 결론에서 “이러한 상업 활동이 랑그독의 유력가들에게 거의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음”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루블린스카야가 주장했던 논점인 상업ㆍ제조업에 기초한 대상인 계급의 지속적 존재와는 무관하다. 게다가 실제로 대상인 계급은 17세기에 걸쳐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세기말에 다가갈수록 더욱 강력해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내수시장이 제한되자 해외시장은 더욱 매력적인 시장으로 변했고, 해외시장을 겨냥한 상업ㆍ제조업이야말로 계속해서 큰 이윤을 남겼다.

바이크와 파커는 17세기 절대주의 체제의 틈바구니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아 계속 발전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평가절하 한다. 그들은 한 사회 체제 내에서 경제적ㆍ정치적으로 상호모순적인 과정들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는 관념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들은 국가정책을 놓고 볼 때 17세기 중상주의는 특권적 심성을 가진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는 국가를 위한 단순한 세수 증대 장치였을 뿐이며, 경제발전을 놓고 볼 때 17세기는 실패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바이크의 주장처럼 수많은 실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그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에서 전통적 귀족들은 18세기 프로이센의 귀족들처럼 경제발전과 국가권력 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방향에서 파커는 1700년의 상업참사회의 설립이 상업ㆍ제조업 부르주아지의 힘보다는 취약성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한 경제적 보호주의, 운하 건설, 행정의 합리화, 신대륙에 대한 식민주의가 17세기 프랑스 대상인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었음을 부정하는 바이크와 파커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바이크는 재정관들의 탐욕스러움에 국가가 의존함으로써 큰 자본시장의 조성이 가능해졌으며, 이것이 18세기 프랑스 대은행가 일부의 자산을 이루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는 콜베르의 계획에서 바로 이 재정관들이 제조업의 발전과 상업의 해외 팽창에 중요했다는 점은 무시한다. 쇼시낭-노가레는 17세기의 재정관들이 단순한 흡혈귀는 결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稅收의 일부가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전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한 비중이 생산부문으로 흘러들어갔다. 쇼시낭-노가레에 따르면, 17세기에 랑그독의 재정관들은 상업과 제조업으로부터 분리된 고위공직자 집단으로만 볼 수 없다. 그들은 대부분 위그노였으며 지역 은행업을 지배했는데, 새로이 등장한 국제은행업 부문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바이크는 억압적 과세와 금융자본의 의도되지 않은 결합은 인식하면서도, 이처럼 탐욕스러운 국가재정이 프랑스 사회에 풀뿌리 차원에서 중요한 경제적 진보를 가져온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16세기 종교전쟁 기간의 본원적 축적을 논하면서, 우리는 임노동이 점점 더 흔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끈질긴 국가재정정책이 농민에게서 도시 부르주아지로의 토지 이전을 초래했다. 이것은 뒤이은 1598~1715년 내내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임노동이 돌이킬 수 없게 발전했다. 즉 17세기의 재정정책은 이러한 임노동의 일반화에 숨겨진 중요한 요소였다. 값싼 임노동 시장의 성장은 프랑스 경제의 구조적 특징이 되었다. 18세기에 이 임노동자계급이 더욱 더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농업ㆍ상업ㆍ제조업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바이크와 파커는 국가와 시장이 언제나 서로 대립한다는 앵글로-색슨적인 발상에 기초해서, 구체제 프랑스의 국가가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존재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관념은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결론>

이상으로부터 바이크와 파커가 운위하는 17세기 부르주아지의 죽음은 분명히 과장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농촌 자본주의는 방어적인 입장에 내몰려서도 한 세기에 걸친 맹공(지대와 조세의 상승)을 견뎌냈다. 상업ㆍ제조업 자본주의도 유사하게 세기 중반부의 침체기를 견뎠는데, 1620년대까지는 번성했고 17세기 막바지에는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바이크와 파커는 귀족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면서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그들은 부르주아가 확고한 귀족의 지배에 맞서 끈질기게 존속했음을 부정함으로써 활시위를 너무 세게 당겼고, 상층계급의 반동을 과소평가함으로써 화살을 너무 약하게 쏘았다. 귀족의 이익에 봉사했던 부르봉 국가를 건설한 것은 단순히 지대의 우세함만이 아니었다. 사실 부르봉 국가는 이전 세기에 이루어진 이윤의 공세에 대한 장기에 걸친 사회적ㆍ정치적 반동이다. 한 계급(귀족)이 단지 배타적으로 지배했을 뿐 아니라 배타적으로 존재하기도 했다는 바이크와 파커의 주장은 역사적 증거와 들어맞지 않는다. 또 그 주장은 17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그 전 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서, 그리고 획일적이고 고정적인 사회로서 제시한다.

이 글은 17세기 부르주아지의 생존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절대왕정이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을 재천명했다. 이제까지의 분석으로부터 구체제에서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장기간 지속되는 발전을 상정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적ㆍ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재확립할 수 있다. 즉 16세기에 등장했던 농촌 및 도시 부르주아지는 도중에 공격 받아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18세기에 다시 공세로 돌아섰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