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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노예상인이자 영란은행 총재, 험프리 모리스

험프리 모리스(Humphry Morice), 1671년생, 1731년 사망. 휘그파에 속하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상인이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사들여 노예선으로 수송해 아메리카에 판매하는 (이 항해 과정은 아주 가혹했으며, 많은 흑인들이 죽었다)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이 악랄한 부자는 정계에 입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중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 총재까지 되었다. 그는 은행자금을 £29,000이나 횡령했고 가족들의 돈까지 빼먹었으나 사후에도 빚을 £150,000나 남겼다.

그가 당시 횡령한 금액은 2017년 물가로 환산하면 £4,800,000나 되는데도 죽을 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2,000,000나 되는 빚을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은행은 그의 사후 횡령액을 돌려받기 위해 미망인을 상대로 43년 동안이나 소송을 진행했지만 결국 £12,000을 돌려받는 데 그쳤다.

이런 인간 이하의 인간도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다비드 르마르샹(David Le Marchand)이라는 프랑스 조각가가 아프리카산 상아로 조각품을 만들어줬고, 넬러(Godfrey Kneller)라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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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프랑스혁명 은 부르주아혁명 이 아니었는가? - 역사서술의 유산 - 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

<선을 넘는 녀석들(TV/설민석)>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선을 넘는 녀석들>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김대보  한국교원대  “왕과 귀족은 평민이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찬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모을 국민의회를 결성했고, 성난 시민들은 왕권유지를 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습격했다.1) 그리고 이 습격사건은 최초의 민주화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전 세계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바스티유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은 그곳에 정치범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민중들에 의해 영웅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4년 후, 절대권력이던 루이 16세는 시민들 손에 이끌려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완성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유죄가 되기 전에 왕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과거의 치욕을 복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치욕은 루이르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를 지나가던 루이 16세 앞에서 학생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가 무릎을 꿇고 시를 읊었지만, 루이 16세가 시큰둥하게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통하지 않은 왕의 말로가 비참했다. 이제 민중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국민에 의한 국민공회가 만들어졌고, 3인방(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이 주도했다. 민중들은 혁명이 오면 신세계가 올 줄 알았는데, 이 세 사람이 독재를 시작했다. 여기서 마라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몇 달 안에 십만 명만 죽이게 해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라를 죽인 사람이 코르데인데, 심문 과정에서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답했다. 코르데는 공포정에 맞섰던 암살천사였다. 당시 사람들이 코르데의 미모를 보고 반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라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도 암살당할 수도 있다면서 더 무섭게 독재를 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사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 마티아스 미델(Matthias Middell)

프랑스혁명과 부르주아지: 역사서술의 유럽적 전통 마티아스 미델 이 글의 목적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지의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연구는 축소되었다. 게다가 이 ‘나머지 유럽’의 연구에는 어떤 동질성도 없다. 또 주변부가 흔히 그렇듯이, 이 ‘나머지’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불명확하며,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학회나 주제별 학술지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1960년 스톡홀름과 1990년 마드리드의 세계학술대회 사이에 이 ‘나머지 유럽’은 많은 혁명사가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가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구심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les Daline, Lesnodorski, Mejdricka, Benda, Töennesson, Markov, Galanta Garrone, Saitta 등)이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운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은 파머(Robert Palmer)와 소불의 작업에서 공통언어를 발견했다. 이 유럽의 ‘학파’ 외에도 혁명사 연구자로 호주의 루데, 일본의 타카하시, 중국의 장지량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진 소불―퓌레 논쟁의 결과로 1960년대 말부터 혁명의 사회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혁명정치를 사회적 조건으로써 설명했으며, 하층민 연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루데, history from below)’에 초점을 맞추었다.(소불의 상퀼로트 연구와 르페브르, 아도, 달린, 타카하시의 농민 연구) 그러나 다수는 정치사에 몰두했다.(혁명력 3년 상퀼로트의 패배, 혁명군 등) 네 권짜리 자크 루(Jacques Roux) 전기를 쓴 동독의 마르코프처럼 한 인물에 집중하는 사가도 있었다. 자기비판은 나중에 나타났다. 마르코프는 일단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