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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주년 :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John Reed,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New York, 1919)


I. 개요

언론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전 세계 유수 언론사의 신입기자 교재로 쓰일 정도로 1917년 10월 혁명에 관한 르포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레닌이 서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흥미롭고,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다. 본문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혁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1월 농민대회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II. 서술방식

리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역사의 일부분을 서술한다는 자세로 저술에 임했다. 리드는 각종 개념을 사용하는 역사적 분석을 최소화하고 르포의 맛을 살렸다. 결과적으로 그의 글은 비록 일방의 관점이 짙게 반영되어 있음에도 후대에 소중한 사료가 되었다. 리드는 자신의 직접 체험, 간접 경험, 큰 틀에서의 분석을 버무려 썼다.

리드는 어느 상인 가족 이야기, 만찬 이야기, 보수인사와의 인터뷰, 트로츠키와의 인터뷰, 집회 목격담, 거리에서 관찰하고 체험한 병사 및 노동자들의 언행과 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리드는 자신의 입장을 세울 때 종종 위와 같은 관찰기록을 덧붙여서 주장에 무게를 더했다. 그는 집회에서의 노동자의 발언, 병사의 발언, 농민의 발언, 지도자들의 발언과 그에 대한 청중의 반응까지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는 겨울궁전 습격이 얼마나 무혈혁명에 가까웠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부르주아 언론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으로 둔갑시켰는지도 실감나게 썼다. 그렇게 쓰기 위해서 리드는 주요 사건이 터지는 곳마다 몸소 달려가서 글감을 뚫었다.


III. 혁명에 대한 입장

리드는 혁명에 대한 깊은 경탄과 존경을 표시했다. 그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었으며 볼셰비키의 등장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다”고 썼다. 그의 견지에서, 10월의 봉기는 “고통 받는 민중을 이끌고 역사에 뛰어든, 또 민중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류가 시도한 가장 경이로운 모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드는 “꼼꼼한 취재기자의 눈으로 사건들을 보려 했고, 진실만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글을 읽어보면, 그가 부르주아와 노동자 양편의 이야기를 모두 싣고는 있지만 분명히 노동자 편에서 쓰고 있음 또한 느낄 수 있다.

리드는 2월 혁명이 온건 사회주의자와 부르주아지의 “공허한 타협”이라고 썼다. 리드의 견지에서,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를 수용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정책은 “효과 없는 개혁과 강경 탄압 사이를 오갔다.” 치안이 무너져도 임시정부는 그것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리드의 르포에서 임시정부는 경찰국가에도 이르지 못하는 전쟁지휘부이자 기반 없는 기득권 세력의 허약한 보루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부르주아 지배를 강행했으며, 러시아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졌다. “재산을 가진 계급은 점차 보수화했고, 민중은 급진화했다.”

사업가와 지식인은 혁명을 끝내고 싶어 했다. 혁명이 길게 지속되면 사업에 이롭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은 충분히 멀리 왔다. “사태가 진정될 때가 됐다.” 이제 이쯤에서 혁명을 끝내고, 전쟁을 충실하게 잘 수행해서 연합국과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것이 리드가 정리해낸 임시정부와 그 지지층의 입장이었다.

리드가 보기에, 병사와 노동자와 농민은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고, 전쟁을 지속하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들은 평화, 토지, 노동자 통제를 원했다. 그들은 혁명을 더 진행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으로부터 볼셰비키로 지지를 옮겼다. 볼셰비키는 과격한 폭력분자들이 아니라 노동자와 병사의 진정한 대변인이었다. 리드에 따르면 농민들도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무산계급은 어느 정도 통일된 뜻으로 혁명을 향해 나아갔으며, 볼셰비키는 그 계급의 진의를 알아차린 유일한 세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혁명을 탈취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핍박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그들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 동시에 볼셰비키는 그들의 해방을 위한 가장 뛰어난 지도집단이었다.


리드의 글에서 레닌은 적절하게 고집이 있고 불의나 기회주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진정한 혁명적 혜안을 가진 지도자이자 지식인으로 나타난다. 트로츠키는 빼어난 연설가이자 당당한 혁명가다. 그에 비해 멘셰비키 인사들의 연설은 대체로 힘이 없거나 과도하게 교조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리드는 연사들의 몸짓과 목소리, 눈빛까지 설명했다.) 리드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쉽사리 편향성을 논하기 힘들지만, 글을 읽어보면 이런 느낌을 받게 된다. 케렌스키와 나머지 임시정부 인사들, 그리고 부르주아 언론사들은 과격하고 비겁하고 거짓말과 선동을 일삼는 부패한 세력이다. 그들은 돈으로 사람을 사서 술책을 부린다. 그리고 그들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민중의 신뢰를 영원히 잃었다.” 볼셰비키는 우유부단하지 않았고 비겁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진행된 계급전쟁에서 단호하게 약자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해방을 향해 전진했다. 이것이 리드의 논조였다.

리드는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이 아마도 의회정치나 형식적 민주주의 면에서 “서구인들 같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발적 조직의 측면에서 잘 훈련돼 있었다”고 썼다. 그가 볼 때 소비에트들의 존재는 노동자들의 범상치 않은 조직적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드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능숙했다고 썼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움츠리고 물러서려 할 때 노동자들은 직접 연설하고 선동하고 스스로 조직화했다.

리드의 서술에 등장하는 병사들은 구체제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단에 대한 적대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군대의 민주화와 평화를 요구했다. 병사들은 소비에트 집회에서 연설하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때때로 병사의 발언에 반대하는 장교의 발언은 야유에 묻혔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10월 17일에 임시정부를 더 이상 정부로 보지 않을 것이며 오직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만이 자신들의 정부라고 선언했다. 수비대 6만 명은 혁명의 닻이었다. 그들은 병사 소비에트를 창설했고, 코르닐로프를 막아냈다. 그들은 모스크바 천도라는 부르주아지의 책략에도 반대했다. 그들이야말로 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볼셰비키가 됐다.” 크론슈타트의 수병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리드의 글에서 노동자와 병사는 10월 혁명의 진정한 추동력이었고 주도세력이었다. 볼셰비키는 당시 노동자, 병사, 거기에 더해 농민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의 뜻에 목숨을 바친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그래서 볼셰비키의 봉기는 음모가 아닌 혁명이었다.


IV. 정리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볼셰비키가 음모집단이 아닌 대중적 혁명지도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중과 반동세력 사이의 단절과 반목이 이미 너무 깊어서 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생존과 정의를 외치는 민중의 소박하고 단순한 열정이 부패하고 이기적인 부르주아지의 기회주의와 술책에 대비된다. 리드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전에 노동자, 병사, 농민을 아우르는 광범위하고 확고한 민중적 지지를 얻었지만, 반대로 다른 정파들은 민중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기득권 세력, 상황과 정세, 교조적 이론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였다. 리드의 책은 이런 것들을 ‘주장’하기보다는 르포의 형태로 ‘보여주려’는 서사전략을 취한다. 책 곳곳에서 10월 혁명과 사회주의를 향한 당시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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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1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르노블이라는 프랑스 동남부의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그곳에서 무심코 찾아간 한 공공기관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 기관은 이제르 도립 문서보관소(Les Archives départementales de l’Isère)였다. 그곳은 분명 이제르 도 행정 혹은 국가 행정과 관련된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공공기관이었지만, 어학연수를 받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가면서 느낀 것은 문서보관소라는 곳이 도서관 같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국가기록원을 비롯하여 공공기관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물 보관소, 혹은 문서보관소라고 불리는 기관의 이미지는 이 때 모두 생겼다. 
파리1대학에 입학한 후, ‘역사학도라면 응당 문서보관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만 가지고 파리에 있는 국립 문서보관소(한국의 국가기록원에 해당)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르노블에서 프랑스의 문서보관소를 살짝 느껴봤기 때문에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하게 찾아간 셈이다.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문서를 어떻게 신청하는지, 등록은 어디서 하는지, 나한테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등 정말 중요한 정보들을 하나도 모른 채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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