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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데리다, <인간의 종말>

발췌 - 자크 데리다, '인간의 종말(Les fins de l’homme)'

佛文 145:1~147:0

이제 우리는 현상(phainesthai)의 사유를 목적(telos)의 사유에 연결하는 필연성을 이해하게 됐다. 동일한 통로를 통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지배하는 목적론(téléologie)을 읽을 수 있다.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인류/인간성(humanité)”은 여전히 그것을 향해 초월론적 목적(telos)이 자신을 알리는 존재의 이름이다. 이 때 초월론적 목적(telos)은 칸트적 의미의 이념(Idée)으로, 또는 심지어 이성(Raison)으로 규정된다. 목적론적 이성의 전개, 다시 말해 역사가 전개될 장소를 지정하는 것은 가장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설에서도 이성은 곧 역사며, 역사는 오직 이성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이성은 “모든 인간에서, 아무리 원시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성적 인간인 모든 인간에서 작동한다.” 모든 종류의 인류/인간성과 인간적 사회성은 “인간적 보편성의 본질적 요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성을 관통하며 가로지르는 목적론적 이성이 이 뿌리 안에서 자신을 알린다. 이와 함께 독자적인 문제제기(또는 일단의 문제들)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의 전체성과 관계하며, 최종적으로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전체의미와 관계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인류/인간성을 가로지르는 이성의 목적론의 궁극적 실현이다. 따라서 후설이 필요할 때마다 현상학적 표지(indice)나 괄호(guillemets)로 영향을 미치면서 소생시키고 복원시킨,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의 권위 하에서, 경험론적 인간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초월론적 인간주의를 단언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후설의 추론에서 본질적 자원을 형성하는 이 형이상학 개념들 중에서, 종말(fin)과 목적(telos)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상학의 모든 단계에서, 또 특히 “칸트적 의미의 이념”에 의지하는 것이 필요해질 때마다, 목적(telos)의 무한성, 종말(fin)의 무한성이 현상학의 능력을 규제함을 보여줄 수 있다. (사실적인 인간학적 한계로서의) 인간의 종말은 (규정된 통로 또는 목적의 무한성으로서의) 인간의 종말로부터 사유에 대하여 자신을 알린다. 인간은 – 종말이라는 단어의 근본적으로 애매한 의미에서 – 자신의 종말과 관계하는 어떤 것이다. 영원 이래로. 초월론적 종말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조건에서만, 이념성의 기원으로서의 유한성과의 관계(라는 조건)에서만 나타나고 전개될 수 있다. 인간의 이름은 언제나 이 두 끄트머리 사이에서 형이상학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이 종말-목적론적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원문각주 12번 : “그러므로 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와 실현이 전개되는 상이한 계획들(plans)에 따라 분기되는 합리주의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자신을 밝히기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성(Ratio)이다. 이 움직임은 인류/인간성 속으로의 철학의 첫 침입에서 시작한다. 이성은 이 인류/인간성에 내재한 것인데도 그때까지 인류/인간성은 혼란과 어둠 속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이성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인간이, 그리고 파푸아뉴기니 사람이, 야수에 대립하는 동물성의 새로운 단계를 표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이성은 인류/인간성과 그 이성의 새로운 단계를 표상한다.”

원문각주 13번 : 후설은 1934년의 짧은 단편에서 역사성의 세 수준과 세 단계를 구별했다. 1. 인간적 사회성 일반으로서의 문화와 전통 2. 유럽 문화와 이론적 기획 (과학과 철학) 3. “철학의 현상학으로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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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서고 탐방 #1 - 프랑스 이제르 도립사고 + 국립사고(Archives nationales de France) - 김대보

유럽 문서고 탐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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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1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르노블이라는 프랑스 동남부의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그곳에서 무심코 찾아간 한 공공기관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 기관은 이제르 도립 문서보관소(Les Archives départementales de l’Isère)였다. 그곳은 분명 이제르 도 행정 혹은 국가 행정과 관련된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공공기관이었지만, 어학연수를 받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가면서 느낀 것은 문서보관소라는 곳이 도서관 같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국가기록원을 비롯하여 공공기관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물 보관소, 혹은 문서보관소라고 불리는 기관의 이미지는 이 때 모두 생겼다. 
파리1대학에 입학한 후, ‘역사학도라면 응당 문서보관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만 가지고 파리에 있는 국립 문서보관소(한국의 국가기록원에 해당)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르노블에서 프랑스의 문서보관소를 살짝 느껴봤기 때문에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하게 찾아간 셈이다.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문서를 어떻게 신청하는지, 등록은 어디서 하는지, 나한테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등 정말 중요한 정보들을 하나도 모른 채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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