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다(Andrzej Wajda)의 영화 <당통(Danton)>은 1) 로베스피에르를 부정적 인물로 재현하고 당통에게 과도하게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2) 그리고 폴란드의 바웬사를 당통에 대입했다는 이유로 개봉 당시 프랑스 진보지식인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적 혁명사가 중 대가이자 대인배인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는 이 영화가 로베스피에르를 재현한 방식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한 바 없지만, 바이다의 영화에서도 나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바이다의 로베스피에르는 광인이 아니며 환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그는 의연하다. 그는 만인의 행복을 바란다고 믿으며, 인민을 보호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그는 폭력의 해악을 명철하게 자각하고 있다. 또 그는 폭력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곳으로 모으려 한다. 물론 영화에서 피비린내 나는 인물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런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마티에類의 공감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선의를 갖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통치의 역사에서 독특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린 한 정치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공안위원회 집무실에서 우리의 근대성이 태어난 것이다. 작품은 학문적 작업에 독특한 보조제의 역할을 한다. 작품을 그 자체로 환영해야만 한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한 바 없지만, 바이다의 영화에서도 나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바이다의 로베스피에르는 광인이 아니며 환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그는 의연하다. 그는 만인의 행복을 바란다고 믿으며, 인민을 보호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그는 폭력의 해악을 명철하게 자각하고 있다. 또 그는 폭력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곳으로 모으려 한다. 물론 영화에서 피비린내 나는 인물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런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마티에類의 공감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선의를 갖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통치의 역사에서 독특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린 한 정치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공안위원회 집무실에서 우리의 근대성이 태어난 것이다. 작품은 학문적 작업에 독특한 보조제의 역할을 한다. 작품을 그 자체로 환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