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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시대의 언론, 자유와 질서 : 포스콜로의 견해

18세기 "계몽의 시대" 유럽에서 정치적 언론이 떠오르면서,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순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자유롭게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과 언론이 중상모략에 가담하여 불필요하게 여론을 호도하거나 군주의 통치를 방해할 수 있으므로 검열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혁명 이전에는 언제나 검열이 존재했고, 1790년대 프랑스혁명기에는 국가의 언론정책이 이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의 편을 번갈아 들어주며 오락가락했다.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럽 각국에서 이 문제는 중요한 화두였다.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운동의 핵심 지식인 중 하나였던 우고 포스콜로(Ugo Foscolo)는 이것이 익명 기사와 필명 또는 이니셜로 서명된 기사가 주를 이루는 당시 상황에서 기인하는 면이 크다고 봤다. 한편으로는 언론이 권력의 재갈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당당하게 서명된 기사가 드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기사에 대해 기자 개인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여론을 호도하거나 부정확하거나 기타 사회적 부작용을 일으키기 쉬운 기사가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스콜로는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을 모두 폐지하는 대신 기자들이 기사에 모두 실명으로 서명하게 만들면, 잘못된 기사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 교정될 것이고, 명백한 명예훼손은 사후에 법정에서 다투면 되므로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이라 주장했다.

(당시 언론의 자유와 검열폐지를 지지하는 것은 강경 급진파로 분류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주장이었고, 소위 온건중도파의 주장은 대개 언론을 정부가 어느 정도 검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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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김민철(이화여대 사학과 강사)
I.

이 글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50세에 출간한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1)을 저술함으로써 18세기의 맥락에서 어떤 언어적 ‘행위’를 한 것인지를 개략적으로 밝히는 짧은 안내서로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인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만큼 필자 또한 당시의 관행을 따라 루소처럼 그 둘을 구분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논평처럼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민주주의의 역설”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2) 루소가 그러한 구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견해를 제출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역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필자는 이 짤막한 글을 통해 루소를 “직접민주주의의 옹호자로”3) 간주하는 독법이나 “그가 유토피아적이고 윤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비전으로 가지고 있었”다고4) 보는 해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회계약론>을 “역사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사회계약론>이 18세기 유럽에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중요한 책도 아니었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이른바 “사상의 사회사”를 주창한 신(新)문화사가들 중에서도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이 이런 주장을 가장 소리 높여 내세웠는데, 그 근거는 <사회계약론>의 판매량이 당시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나 <신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 등 루소의 다른 저작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먼 버로우즈(Simon Burrows)의 후속 연구는 <사회계약론>이 해적판, 요약본 등 비공식적 판로를 통해 널리 유통되었음을 밝혀냈다. 당대에 애덤 스미스는 <사회계약론>이 루소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줄 것이라 예언했고, 볼테르는 <사회계약론>…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프랑스혁명부르주아혁명이 아니었는가? - 역사서술의 유산 -

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

극중도(l'extrême centre) 개념

"극중도(l'extrême centre)"는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혁명사강좌주임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 교수가 2005년에 낸 책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라자르 카르노를 비롯해 현 프랑스의 "기술관료지배"를 만들어낸 1789-1830년 혁명세대의 몇 가지 사상적 조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카르노, 콩스탕, 레알, 당글라,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밖에 수십 수백의 추종자를 거느린 이념이자 입장으로서, 극중도는 왕당파도, 완고한 보수주의도, 급진적 민주주의도 거부하고, 국가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길러낸 초엘리트가 인민을 계도하고 인민에게 봉사하되 인민의 통치를 결코 받지 않는 정치를 가리킨다.
극중도의 이념은 온건한 개혁을 통한 단선적이면서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법률과 행정을 통한" 진보를 추구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의회와 토론이 아닌 행정부와 실행력이 전진의 동력이다. 그래서 극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모든 준동을 때에 따라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국가폭력으로 찍어누르고 엘리트가 규정한 부국강병 및 점진적인 인류진보의 전망에 따라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며, 세르나의 표현으로는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이념과 논의도 허용하지 않는" 국가이념이다. 
따라서 버크식 보수주의나 로베스피에르식 진보주의의 프레임으로는 극중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을 바꾸는 팔랑개비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 뿐이다. 극중도는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세르나가 볼 때 20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를 지배한 국가사상의 근간이다.
(세르나는 감정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극중도에게 탄압 당하고 유배가야했던 민주파에 가장 크게 공감하면서도 이 책에서 놀라울 만큼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