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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존 로크의 <통치론>과 사회계약론

1660년, 1667년, 1676년에도 (어떠한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존 로크(John Locke)는 명예혁명 이전에 입장을 완전히 바꿔서 자기가 속해 있던 샤프츠베리 당파에 유리하게 <통치론>을 저술했다.


이 책은 1683년경에 분량 대부분이 집필되어 있었으며, 추가 수정을 거치고 분량을 절반 이상 압축해서 명예혁명 이후인 1689년에 출판되었다. 로크는 이 저서에서 신의 뜻과 자연법에 토대를 두고 신체권, 소유권, 저항권을 규정했고, 이것들을 기둥으로 삼아 사회계약론적 통치 이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로크는 자연법의 기초에 대한 논증을 생략하고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으로 자연법을 느낄 수 있다고만 썼는데, 이것은 당시 커다란 허점으로 인식되어 많은 논객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로크도 자신이 <통치론>의 이 토대를 정교하게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느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가 언젠가는 이것을 정식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존 던(John Dunn)의 해석을 요약한 것이다. 추가로, 로크의 <통치론>은 그의 종교관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읽어야만 하며, 쉽사리 현대 자유주의의 기원으로서 호출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통치론의 원제: Two Treatises of Government: In the Former, The False Principles, and Foundation of Sir Robert Filmer, and His Followers, Are Detected and Overthrown. The Latter Is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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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김민철(이화여대 사학과 강사)
I.

이 글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50세에 출간한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1)을 저술함으로써 18세기의 맥락에서 어떤 언어적 ‘행위’를 한 것인지를 개략적으로 밝히는 짧은 안내서로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인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만큼 필자 또한 당시의 관행을 따라 루소처럼 그 둘을 구분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논평처럼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민주주의의 역설”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2) 루소가 그러한 구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견해를 제출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역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필자는 이 짤막한 글을 통해 루소를 “직접민주주의의 옹호자로”3) 간주하는 독법이나 “그가 유토피아적이고 윤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비전으로 가지고 있었”다고4) 보는 해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회계약론>을 “역사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사회계약론>이 18세기 유럽에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중요한 책도 아니었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이른바 “사상의 사회사”를 주창한 신(新)문화사가들 중에서도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이 이런 주장을 가장 소리 높여 내세웠는데, 그 근거는 <사회계약론>의 판매량이 당시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나 <신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 등 루소의 다른 저작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먼 버로우즈(Simon Burrows)의 후속 연구는 <사회계약론>이 해적판, 요약본 등 비공식적 판로를 통해 널리 유통되었음을 밝혀냈다. 당대에 애덤 스미스는 <사회계약론>이 루소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줄 것이라 예언했고, 볼테르는 <사회계약론>…

극중도(l'extrême centre) 개념

"극중도(l'extrême centre)"는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혁명사강좌주임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 교수가 2005년에 낸 책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라자르 카르노를 비롯해 현 프랑스의 "기술관료지배"를 만들어낸 1789-1830년 혁명세대의 몇 가지 사상적 조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카르노, 콩스탕, 레알, 당글라,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밖에 수십 수백의 추종자를 거느린 이념이자 입장으로서, 극중도는 왕당파도, 완고한 보수주의도, 급진적 민주주의도 거부하고, 국가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길러낸 초엘리트가 인민을 계도하고 인민에게 봉사하되 인민의 통치를 결코 받지 않는 정치를 가리킨다.
극중도의 이념은 온건한 개혁을 통한 단선적이면서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법률과 행정을 통한" 진보를 추구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의회와 토론이 아닌 행정부와 실행력이 전진의 동력이다. 그래서 극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모든 준동을 때에 따라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국가폭력으로 찍어누르고 엘리트가 규정한 부국강병 및 점진적인 인류진보의 전망에 따라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며, 세르나의 표현으로는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이념과 논의도 허용하지 않는" 국가이념이다. 
따라서 버크식 보수주의나 로베스피에르식 진보주의의 프레임으로는 극중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을 바꾸는 팔랑개비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 뿐이다. 극중도는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세르나가 볼 때 20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를 지배한 국가사상의 근간이다.
(세르나는 감정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극중도에게 탄압 당하고 유배가야했던 민주파에 가장 크게 공감하면서도 이 책에서 놀라울 만큼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준다.)

<선을 넘는 녀석들(TV/설민석)>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선을 넘는 녀석들>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김대보  한국교원대 
“왕과 귀족은 평민이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찬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모을 국민의회를 결성했고, 성난 시민들은 왕권유지를 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습격했다.1) 그리고 이 습격사건은 최초의 민주화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전 세계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바스티유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은 그곳에 정치범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민중들에 의해 영웅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4년 후, 절대권력이던 루이 16세는 시민들 손에 이끌려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완성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유죄가 되기 전에 왕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과거의 치욕을 복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치욕은 루이르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를 지나가던 루이 16세 앞에서 학생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가 무릎을 꿇고 시를 읊었지만, 루이 16세가 시큰둥하게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통하지 않은 왕의 말로가 비참했다. 이제 민중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국민에 의한 국민공회가 만들어졌고, 3인방(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이 주도했다. 민중들은 혁명이 오면 신세계가 올 줄 알았는데, 이 세 사람이 독재를 시작했다. 여기서 마라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몇 달 안에 십만 명만 죽이게 해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라를 죽인 사람이 코르데인데, 심문 과정에서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답했다. 코르데는 공포정에 맞섰던 암살천사였다. 당시 사람들이 코르데의 미모를 보고 반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라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도 암살당할 수도 있다면서 더 무섭게 독재를 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