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에서 "부가가치"의 이름으로 그 선진국 정부(VAT+법인세)와 유통업자들(마진)에게 분배되고 GDP에 국내생산으로 집계되는가? 세계 차원의 제국주의적 착취 구조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동시에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기도 한다.

3. <대안은 무엇인가? 이행기제는 무엇인가?>

가난, 불평등, 불의, 환경파괴에 대해서 우리는 대안사회의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로드맵을 생각해야 한다. 이행기제는 철저하게 현실에서 출발해서 현실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의회 제도가 "깨어난 민중"의 압력 때문에 복지 정책을 펼치는 것이 현재 현실적으로 정치인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지고 세계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대안적 로드맵이다. 이 방법은 느리다. 게다가 거의 선진국 전용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 대한 대안으로 혁명을 외치는 사람들이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 중 하나는,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쿠바혁명 등 권력쟁탈에 성공한 혁명들도 결국은 외세와의 전쟁에 시달리고 내전에 휘말리고 국제경제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해 1) 공포정치로 치닫고 2) 억압적 쇄국정책을 펴도록 강요받거나 3)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에 생명줄을 던져주는 세계의 공장이 되어 차라리 "자유민주주의"보다도 못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혁명만이 답일 때도 있었고, 19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들의 담합으로 인해 중장기적으로 처절하게 실패한 18세기 말의 아이티혁명을 두고 "점진적 이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1번 섹션에서 부정적인 답을 내렸다. 그리고 자본가들을, 또는 "자본의 구조"를 비난하는 것은 저 위 2번 섹션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난을 넘어서 군사적/경제적/민주적으로 지속 가능한 대안사회의 비전과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로드맵은 전 세계의 자유주의 경제체제들과 지속적으로 전쟁할 능력을 갖춘 일국 사회주의, 또는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 훌륭한 인물의 독재를 통한 사회변혁과 같은 비현실적 가정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를 치켜세우면서 스탈린을 비난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스탈린은 악마가 아니다. 사면초가에 김빠진 혁명정부를 지켜낸다는 것은 극한직업에 가깝다. "다음 번 혁명"에는 스탈린이 없으리라 믿는 것인가? 스탈린은 어디에나 언제나 있다. 부시도 트럼프도 어디에나 언제나 있다. 그것을 전제한 뒤 고민해야 한다.

4. <Kevin Carter>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고, 같은 해 7월 27일에 33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기쁨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고통이 인류의 삶을 짓누르고 있고, 선진국 시민들은 그저 모든 것을 "돈"과 원조로 해결하려 하지만 주변부의 현실은 굶주림, 총살, 분노, 고통, 그것의 기억에 사로잡힌 생명들로 차 있다는 좌절을 담은 노트를 남기고.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Daniel Bensaïd, <혁명들: 위대하고 정지해있고 침묵하는> 요약-번역

<혁명들: 위대하고 정지해있고 침묵하는> 요약-번역 다니엘 벵사이드
Daniel Bensaïd, "Revolutions: Great and Still and Silent,"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새로운 의미론에 각인되었다. 즉 이제 과거…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

제프 일리, <무엇이 민주주의를 만드는가? 20세기 유럽의 혁명적 위기들, 민중정치, 그리고 민주적 성취> 요약-번역

무엇이 민주주의를 만드는가? 20세기 유럽의 혁명적 위기들, 민중정치, 그리고 민주적 성취 (요약-번역)제프 일리
Geoff Eley, “What Produces Democracy? Revolutionary Crises, Popular Politics and Democratic Gains in 20th-Century Europe,” in Mike Haynes & Jim Wolfreys (eds.), History and Revolution: Refuting Revisionism (London: Verso, 2007)


<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힘을 크게 상실했지만, 한편 시장원칙의 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