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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루소의 <사회계약론> 해제 


김민철 (이화여대 사학과 강사) 

I. 

이 글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50세에 출간한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1)을 저술함으로써 18세기의 맥락에서 어떤 언어적 ‘행위’를 한 것인지를 개략적으로 밝히는 짧은 안내서로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인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만큼 필자 또한 당시의 관행을 따라 루소처럼 그 둘을 구분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논평처럼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민주주의의 역설”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2) 루소가 그러한 구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견해를 제출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역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필자는 이 짤막한 글을 통해 루소를 “직접민주주의의 옹호자로”3) 간주하는 독법이나 “그가 유토피아적이고 윤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비전으로 가지고 있었”다고4) 보는 해석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회계약론>을 “역사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사회계약론>이 18세기 유럽에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중요한 책도 아니었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이른바 “사상의 사회사”를 주창한 신(新)문화사가들 중에서도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이 이런 주장을 가장 소리 높여 내세웠는데, 그 근거는 <사회계약론>의 판매량이 당시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나 <신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 등 루소의 다른 저작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먼 버로우즈(Simon Burrows)의 후속 연구는 <사회계약론>이 해적판, 요약본 등 비공식적 판로를 통해 널리 유통되었음을 밝혀냈다. 당대에 애덤 스미스는 <사회계약론>이 루소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줄 것이라 예언했고, 볼테르는 <사회계약론>의 가장자리에 꼼꼼하게 자신의 독서노트를 적어놓았다. 통속적인 비방문학만큼 많이 팔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18세기에 <사회계약론>의 영향력이 미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편적 사고의 산물이며 이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계약론>은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 1762)>과 함께 여러 유럽국가의 검열당국에 의해 단골로 ‘화형식’에 처해진, 대표적인 불온서적이었다.5) 

그렇다면 <사회계약론>은 어떤 주장을 담고 있었는가? 더 정확하게는, 루소가 <사회계약론>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18세기 지식인들이 맞닥뜨린 난제에 대해 루소가 내놓은 대답이 무엇인지 확인할 것이다. 그 결과 드러나는 <사회계약론>의 주장은 상업으로 타락하고 유약해진 서구의 문명이 내적 부패와 용맹한 동방인의 침공에 의해 몰락할 것이며 인간이 사회 속에서 정치체를 이루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일은 군주정에서든 귀족정에서든 민주정에서든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그나마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극히 미미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한 번도 타락한 법에 노출된 적이 없는 인민이 살고 있으며 대체로 토지가 평등하게 분배된 농업 소국인데, 결국 그런 국가는 상업에 기초한 강대국의 먹이가 될 것이므로 현실에서 인간에게 펼쳐진 자유의 가능성의 지평은 좁디좁아서 한없이 무(無)에 가깝다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민주주의 이론의 근대적 교본인 것처럼 인식되는 오늘날, 이런 독해는 특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독해는 당대인의 독해였으며, 지금도 18세기 유럽의 지성사를 주 연구분야로 삼는 학자들은 이런 인식을 널리 공유한다. 이 해석의 강점은 시대착오적인 현재주의적 해석을 경계하고 당대의 맥락과 <사회계약론>의 문언에 충실한 결론을 도출한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루소의 주장을 상기 요약처럼 제시하는 것이 <사회계약론>의 문언에서 충분하게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II.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6) 루소가 <사회계약론> 제1권 제1장을 여는 유명한 문장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는데 왜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을까? 인간이 ‘자연’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다수의 인간이 사회를, 나아가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유를 수립하거나 보존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경우가 있었던가? 있었다면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가? 만일 없었다면 과연 앞으로도 가능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18세기 유럽의 정치사상은 “자유국가(État libre)”를 규정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이행기제(transition mechanism)를 모색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까지 수백 년간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온갖 도덕철학적ㆍ신학적 논증들이 난무했는데,7) 루소는 자유국가를 “정당하고 확실한 운영원칙”을 보유한 “정치질서”라고 봤다.8) 루소에게서 ‘자연상태’의 자유와 달리 ‘사회상태’의 자유는 법과 원칙에 따르는 자유, 타인의 자유와의 근본적 타협ㆍ공존 방안이 확보되는 형태의 자유로서, 이러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질서인데, 이 질서를 정당한 권리에 기초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반영하고 보호할 수 있는 한계선을 획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주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논증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갈 만한 것이었다.9)

루소는 “강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강도는 그가 무력으로 탈취한 지갑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루소는 “힘은 권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과 “우리의 의무는 오직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누구도 동류에 대해 자연적인 권한을 가지지 않고 힘은 어떤 권리도 생산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의 모든 정당한 권한은 합의를 기초로 삼는다.”10) 루소가 볼 때 자유를 양도하고 얻은 전제군주 치하의 “평온”은 마치 “지하 독방”에서의 안전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것이었다. 인민이 자신의 자유를 매각하는 행위는 그 행위자가 분명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그의 행위는 부당하며 무효가 된다.” 다시 말해 “광기는 권리를 만들지 않는다.” 이로써 루소는 그로티우스를 비롯한 선배 자연법학자들의 논리, 즉 신이 동물로서의 인간과 도덕적 인격체로서의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권리와 의무의 체계는 인간들이 전쟁을 수행하거나 합의로써 절대왕정 또는 노예제를 수립하는 것까지 허용한다는 논리를 거부하고 오직 지속적이고 이성적인 합의와 동의에서 도출된 권리만이 “권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11) 게다가 루소에 따르면 “누구나 자신을 양도할 수 있다 쳐도, 자신의 아이를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한 세대의 노예계약은 다음 세대를 구속할 수 없다.12) 

합의로 만들어진 권한에서만 진정한 권리가 나올 수 있으며, 합의의 주체들은 권한을 부여하고 권리를 보증하는 주체가 된다. 이들이 바로 정치사회의 주권자이다. 주권자로서 결합한 인민은 인-민-들이 아닌 인민‘체(體)’가 되며, 이 하나의 신체는 이런 “인격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하나의 “공적 인격”이다. 이것이 “공화국 또는 정치체”라고 불리는 것이다.13) 이들이 하나의 정치체로서 갖는 의지를 “일반의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각 개인이 갖는 “개별의지”들의 단순합계에 해당하는 “전체의지”와는 다른 것으로서 모종의 합리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흔히 설명된다. 루소의 표현을 빌면 “개별의지는 본성상 편중을 지향하고, 일반의지는 평등을 지향”한다. 일반의지가 입법의 토대라는 말은 곧 공적인 자세로 개인이 전체의 입장에, 즉 한 시민이 이성적으로 국가공동체의 입장에 서서 고민한 결과 갖게 되는 의지에 따라 법과 국가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는 오직 “공동이익을 기준으로 통치되어야” 하며,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의지가 바로 “일반의지”였다.14) 

18세기 담론의 맥락상 루소의 의도는 평등한 자연인들로 구성된 주권자의 사회적 회합만이 합의에 기초한 계약을 통해 “공화국 또는 정치체” 즉 자유국가를 창설하며, 이렇게 창설된 국가만이 “정당한 권한”의 연원이 되며, 국가는 이러한 창설과정을 통해 형성된 “공적 인격”을 갖는 주권자와 일체이자 주권자의 지배 아래에 놓인다는 것, 그리고 주권자가 이렇게 창설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전체의지”가 아닌 “일반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점, 즉 자유국가의 운영은 이해관계의 충돌ㆍ타협이 아닌 공적 사유의 집합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루소는 이로부터 중요한 결론을 하나 도출했는데, 그것이 바로 ‘주권의 불가양도성’이었다. “주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일 뿐이기에 결코 양도될 수 없으며, 주권자는 집합적 존재일 뿐이기에 오직 그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 힘을 이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의지는 그렇지 않다.”15) 각 신분의 균형을 확보하거나 개개인의 이익 간에 상호 합의점을 찾는 것이 특정한 대의제 사상들의 토대였던 반면, 루소에게서 주권은 인민 개개인에게 있지 않고 전체적 집합으로서의 인민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결코 양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주권은 힘의 발현이 아닌 의지의 발현이므로 양도는 어불성설인 것이었다. 

주권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힘이며, 상술한 논증 구도는 근대 초기에 절대왕정의 국왕주권을 설명하는 데에 더 자주 활용되던 것이었다.16) 그러나 루소는 보댕(Jean Bodin) 등과 달리 주권의 소재지를 군주가 아닌 인민에게서 발견했으며, 따라서 “인민단체에게는 어떤 종류의 기본법도 의무가 되지 않으며 의무가 될 수도 없다”라고 주장했다.17) 인민의 의지가 법을 만드는 경우, 법은 인민의 의지 아래에 있으며 이것의 역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헌법이라 할지라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지가 법을 정초할 때 의지는 법 위에 군림한다. 이 논리는 그 명료성에 힘입어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체에서부터 근대 초기 서유럽의 절대군주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지자를 거느렸고, 루소는 그것을 매우 명확한 논리로 다듬어 차용했다. 

그런데 이런 자유국가의 최초 틀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루소는 위대한 입법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연적 자유를 상실하고 사회상태에서 타락한 인간은 욕망, 오만, 자기애에 물들어서 판단력이 흐려졌기에,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의 주권적 단체를 구성하고 국가를 창설하여 현명한 기본법 체계를 확립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루소의 판단이었다. 좋은 법은 그에 걸맞은 인민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조차도 쉽지 않았으니, “수많은 국민이 지상에서 찬란하게 빛났으나 그들도 좋은 법을 감당하지 못했고, 심지어 감당할 수 있던 국민들조차 그들이 존속했던 전체 기간에서 아주 짧은 시간만 그럴 수 있었다.”18) 이는 욕망과 정념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 지상에 세운 자유국가는 결국 시간이 가져오는 부패의 풍화작용 앞에서 힘없이 스러져가고야 만다는 인식이며, 이것이 근대 초기 공화주의의 핵심부에 기입되어 있는 세계관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19) 이 공화주의 전통에 입각해, 루소는 18세기의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유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 정초기에 마치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처럼 위대하고 미덕으로 충만한 “입법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법자는 법을 통해 무엇보다도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덕성으로 향하게 만들어야 했고, 따라서 루소는 입법자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루소는 상업사회에서 이기적이고 사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갖는 악덕을 치유하기 위해20) 입법자가 “각 개인을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 변형시켜 어떤 의미에서 그가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이 큰 전체로부터 부여받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21) 

루소는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입법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인민은 누구인가?”22) 즉 자유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인민이란 어떤 조건을 갖춘 인민인가? 루소는 한 번 타락한 인민이 자유를 얻기란 몹시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아직 진정한 법의 족쇄에 속박된 적 없는 인민”만이 자유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자유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인민은 군사적으로 훈련되어 있고 용맹한 인민이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구성원이 서로 알고 있는” 인민이라는 조건과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자립할 수 있는” 인민이라는 조건이었다. 루소는 이 두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소규모 사회에서만 자유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23) 우리는 루소에게서 이 “자유국가”가 “민주정”과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계약론>이 18세기 정치사상의 일반적 논의구도를 따라 국가의 크기와 정부의 형태라는 두 요소를 고려하여 자유국가의 수립 및 보존 가능성을 판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사회계약론>의 중핵이므로 다음 절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III. 

루소는 국가를 측정하는 방식을 “영토의 넓이”와 “인민의 수”로 양분했다. 영토와 인구는 그 “비율”로 계산되어 최종적으로 “대국”과 “소국”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24) 이것은 18세기 정치사상에서 핵심적인 구분법이었다. 당시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국과 소국의 구분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18세기는 유럽에서 “상업(commerce)”이 거대한 동력으로서 등장하여 국채와 상비군을 등에 업고 새로운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판도를 부과하는 시대였다.25) 플레처,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갈리아니, 흄, 튀르고, 스미스 등 여러 사상가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고, 새로이 도래한 “상업사회”에서 사회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고 순환하는 역사의 덫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즉 격변, 혁명, 몰락을 방지하면서도 구성원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26)이 문제를 놓고 많은 지식인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같은 대국에서 계몽과 자유를 수립하고 보존하는 것이 가능한지, 과연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한지를 고민할 때,27) 루소는 오직 소국에서만, 그것도 상기 엄격한 조건을 모두 갖춘 인민이 사는 소국에서만 겨우 자유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며 그조차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확률이 높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조건들은 충족시키기가 극도로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이 모여 있기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잘 구성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28) 

모든 사회구성원이 서로를 알 정도로 작은 나라에 선량하고 타락하지 않은 인민이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위대한 입법자가 나타나서 훌륭한 헌법을 써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자유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물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 즉 어떤 정부형태가 자유국가를 유지하기에 적합한가? 우리는 여기서 주권과 정부의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루소는 주권이 정부와 매우 다른 것이라고 애써 강조했다. 위에서 살펴본 루소의 인민주권론은 결코 민주정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즉 루소의 인민주권론은 어디까지나 주권론이지 정부형태론이 아닌 것이다. 주권은 “일반적”인 것으로서 입법에 관여하고 정부는 “구체적”인 것으로서 법의 집행에 관여한다. “입법권은 국가의 심장이고, 행정권은 모든 부분의 운동을 일으키는 두뇌다.” 그리고 입법권을 행사하는 의지인 주권은 “정치체의 생명의 원리”였다. “사람은 지능이 떨어져도 산다. 하지만 심장이 기능을 멈추면 그 즉시 동물은 죽는다.”29) 따라서 “심장”인 주권에 비해 “뇌”인 정부형태는 부차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듯, 정부형태도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루소에게서뿐 아니라 다른 많은 당대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인민주권론은 원칙상 어떤 정부형태와도 결합 가능한 것이었다.30) 18세기 서양의 정치담론은 정부의 형태를 논할 때 흔히 그것을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으로 삼분하고 그것들을 더 세부적으로 나누거나 서로 결합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이 때 ‘선거’와 ‘투표’는 귀족정의 요소였으며 민주정의 요소가 아니었다. 

이 분류법에서,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명확하게 민주정에 반대했다. 루소에 따르면 “진정한 민주정이란 존재해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고, “다수가 통치하고 소수가 통치받는 것은 자연적 질서에 반하는” 것이었다. 민주정이 성립하려면 “국가가 아주 작아서, 인민이 편하게 모이고 시민 각자가 다른 모든 시민을 쉽게 알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풍속이 매우 단순해서, 업무가 늘어나고 논의가 까다로워지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게다가 “신분과 재산에서 상당한 정도로 평등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사치가 적거나 없어야” 했는데, 이 경우 “사치”라는 표현은 덕성스러운 검소함이 요구하는 생필품의 범위를 넘어서는 온갖 상품과 그것에 의존하게 되는 정신상태를 포괄했다.31) 민주정은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설사 이 시험을 거쳐 민주정이 수립되더라도 그것은 “내전과 내란에 취약한” 정부형태라서 곧 멸망에 이를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루소는 “신들로 구성된 인민이 있다면, 이 인민은 민주정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것”이지만 “그렇게 완전한 정부는 인간에게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32) 

귀족정은 불평등을 조장하고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루소가 제시한 자유국가의 조건에 들어맞지 않았다.33) 군주정은 “못난 말썽꾼, 3류 사기꾼, 하찮은 모사꾼”이 “출세하는” 정부 형태였으며, 계승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습’이라는 원칙이 후계자의 ‘능력’을 담보하지 못했기에 국가는 계속해서 어리석은 왕과 아첨하는 대신들의 통치라는 위험에 노출되었다. 왕세자를 잘 가르치면 된다는 주장도 루소의 관점에서는 허상에 불과했다. “타인에게 명령하기 위해 교육되는 사람은 어떻게든 정의로움과 이성을 상실”하는 법이었다. 군주정은 대국에 적절한 정부형태라는 18세기의 ‘상식’을 뒤집어서, 루소는 “큰 국가를 잘 통치하는 일이 어렵다면, 그런 국가를 한 사람이 잘 통치하기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34) 

루소는 민주정은 물론이요 귀족정과 군주정으로도 대국이 갖는 단점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대국은 주민들이 서로를 다 알 수 없고 상업과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그 결과 사치와 타락이 지배하게 되므로 자유로운 국가란 요원한 일이었다. 특히 18세기 유럽의 대국은 인민 전체가 분할되지 않은 상태로 주권자로서 지속적으로 회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었다.35) 루소는 심지어 입법권에 대해 대의제를 실시하는 순간 (즉 의지를 양도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정치제도를 만드는 순간) 주권은 파괴된다고 믿었기에 의회제를 인정하지 않았다.36) 게다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루소는 한 번 나쁜 법의 “족쇄”를 찬 인민은 쉽게 바뀌지 않으므로 자유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대국에서 여하한 개혁이나 혁명이 자유를 확립하거나 보존할 수 있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모든 것을 잘 검토한 결과, 나는 아주 작은 도시국가가 아니라면 우리가 주권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37)  

18세기 지식인들은 스위스 산골의 몇몇 민주정을 예로 들어 규모와 인구가 극히 작은 농업국가에서는 민주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기실 다른 모든 지역에서는 민주정이 지탱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한 전제로서 기능했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계약론>의 입장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민의 실제 덕성 상태를 반영하여 인민주권의 원칙에 충실한 입법을 이루어내면 인간이 타고난 자유를 지키며 사회상태에서 정치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것은 평등이 지배하고 사치가 없는 소국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국에서조차 정부형태로서의 민주정은 너무나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하므로 인간이 운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오직 신들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다. 귀족정이나 군주정은 대국에도 적용할 수 있는 정부형태인데, 일차적으로 그것들은 인민주권의 원칙을 충실하게 보존하기에 미흡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고, 이차적으로 그것들은 그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국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전제된 단점들, 즉 상업, 사치, 대의제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인민주권의 원칙이란 아무리 위대한 입법자와 뛰어난 덕성을 갖춘 인민이 있는 경우에도 오직 소국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창설된 국가는 민주정이 아닌 모종의 혼합정체(루소는 결국 모든 정부형태가 일종의 혼합정체라고 말했다)에 의해서만 통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루소가 볼 때 18세기 당대에 이 조건을 만족시킬 유일한 후보는 고작 코르시카뿐이었고, 그 섬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유럽에서 “입법이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었다.38) 

그런데 코르시카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섬의 “애국파”가 일으킨 독립전쟁은 끝내 실패했다. 소국은 대국과 싸워 이길 수 없고, 소국은 대국에 종속되므로 그것의 내적 자유는 외적 종속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18세기 사상가들의 중론이었다. 실제로 루소는 자신이 “조국”으로 간주한 제네바에서 민주적 개혁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고, 제네바의 기존 과두제 정부형태를 통해 인민주권의 원칙이 이미 현실에서 가능한 최대 수준으로 발현되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개혁가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제네바의 개혁가들이 실제로 혁명을 성공시키자 프랑스 군대가 침략하여 혁명가들을 추방하고 기존의 정권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결국 제네바의 혁명가들은 제네바 내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무용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스위스를 떠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에서 “대국의 혁명”을 꾀했다. 그들은 유럽 전체를 혁명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강대국들을 개혁하지 않으면 약소국의 내치에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39) 상황이 이러했으니 루소는 소국이 내적으로 자유국가를 수립하고도 외국의 침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야만 했다. 이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자신이 제시한 온갖 까다로운 (사실상 충족불가능한) 조건들을 다 갖춘 소국에서조차 그토록 어렵게 수립된 자유는 순식간에 강대국의 군화에 짓밟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는 “아주 작으면 정복되고 말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존하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을 반복한 것이다.40) 루소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루며 <사회계약론>의 마지막 장에서 “대외관계” 즉 “만민법, 교역, 전쟁법, 정복, 공법, 동맹, 협상, 협약”을 다룰 후속 저작을 예언했으나41) 끝내 그 책을 쓰지 못했다. 남아 있는 그의 수고(手稿)를 볼 때, 시간이 없거나 관심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작업을 시도했으나 만족할 만한 답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IV. 

<사회계약론>은 절망과 실패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와 프랑스혁명기 독자들은 루소의 감성적 자연주의에 공감하거나 루소의 정치적 회의주의와 절망에 맞서는 것으로 반응이 갈렸다.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 이젤린(Isaak Iselin), 미라보(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 콩도르세(Marie Jean Antoine Nicolas de Caritat, marquis de Condorcet), 앙토넬(Pierre-Antoine Antonelle) 등 많은 개혁가들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루소의 회의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해야만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고, “루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로써 개혁가ㆍ혁명가로서의 대의를 천명하곤 했다.42) 루소는 사회상태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집단적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가를 물었고, 그 자유가 가능할 조건들을 파악해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동태적 목록으로 정리했다. 그 조건들은 너무나 현실과 괴리되어 있었기에 루소 자신조차 그것이 실현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설령 그런 엄격한 조건들을 다 갖춘 작은 정치체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강대국의 침략으로부터 보존할 방도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고, <사회계약론> 이후에도 루소는 그것을 끝내 찾지 못했다. 루소가 타진한 개혁의 전망, 타락한 인민이 갱생할 수 있는 자유국가의 전망은 몹시 어두웠다. 유럽 문명 전체의 전망도 마찬가지였으니, 루소는 <사회계약론> 제2권 제8장에서 “타타르인이 러시아와 우리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동방의 “야만”이 결국 타락한 유럽의 상업문명을 짓밟을 것이고 흥망성쇠의 반복을 강제하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고야 말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격변은 틀림없이 일어난다.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유럽의 모든 왕들이 일치협력하여 일하고 있다.”43) 

[주석]


1) 인용하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출처는 모두 김영욱 역 (후마니타스, 2018, 1판 1쇄)의 쪽수로 표기한다.


2) 오근창, 「일반의지의 두 조건은 상충하는가?: 루소와 ‘자유롭도록 강제됨’의 역설」, <철학사상>, 50 (2013), pp. 67-98(85).

3) 류청오, 「공화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 <진보평론>, 43 (2010), pp. 224-251(226).

4) 오영달, 「인권과 민주주의: 로크와 루소의 정치사상 비교」,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8), pp. 29-45(39).

5) Robert Darnton, The Literary Underground of the Old Regim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id. <책과 혁명: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 셀러>, 주명철 역 (알마, 2014); Hannah Barker & Simon Burrows (eds.), Press, Politics and the Public Sphere in Europe and North America, 1760-1820(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Ann Thomson, Simon Burrows & Edmond Dziembowski (eds.), Cultural Transfers: France and Britain in the Long Eighteenth Century (Oxford: Voltaire Foundation, 2010); Simon Burrows, The French Book Trade in Enlightenment Europe II: Enlightenment Bestsellers(London: Bloomsbury Academic, 2018).

6) <사회계약론>, p. 11.

7) Quentin Skinner,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박동천 역 (한길사, 2004); id.,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조승래 역 (푸른역사, 2007); id.,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2: 종교개혁의 시대>, 박동천 역 (한국문화사, 2012); Hilary Gatti, Ideas of Liberty in Early Modern Europe: From Machiavelli to Milt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8) <사회계약론>, p. 10.

9) <사회계약론>, p. 10.

10) <사회계약론>, p. 16.

11) Richard Tuck, Natural Rights Theories: Their Origin and Develop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Knud Haakonssen, Natural Law and Moral Philosophy: From Grotius to the Scottish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T. J. Hochstrasser, Natural Law Theories in the Early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Ian Hunter & David Saunders (eds.), Natural Law and Civil Sovereignty: Moral Right and State Authority in Early Modern Political Thought (Houndmills,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2); Benjamin Straumann, Roman Law in the State of Nature: The Classical Foundations of Hugo Grotius’ Natural Law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12) <사회계약론>, p. 17.

13) <사회계약론>, pp. 25-26.

14) <사회계약론>, p. 35.

15) <사회계약론>, p. 35.

16) Nannerl O. Keohane, Philosophy and the State in France: The Renaissance to the Enlightenment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0); 임승휘, 「장 보댕의 국가론과 절대주의」, <프랑스사 연구>, 13 (2005), pp. 133-159; Jean Bodin, <국가에 관한 6권의 책>, 총 6권, 나정원 역 (아카넷, 2013)

17) <사회계약론>, p. 27.

18) <사회계약론>, p. 58.

19) J. G. A. Pocock,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 총 2권, 곽차섭 역 (나남, 2011); David W. Carrithers, “Not So Virtuous Republics: Montesquieu, Venice, and the Theory of Aristocratic Republicanism,”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52:2 (1991), pp. 245-268; Linda Kirk, “Genevan Republicanism,” in David Wootton (ed.), Republicanism, Liberty, and Commercial Society, 1649-1776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pp. 270-309; Richard Whatmore, Republicanism and the French Revolution: An Intellectual History of Jean-Baptiste Say’s Political Econom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Johnson Kent Wright, “The Idea of a Republican Constitution in Old Régime France,” in Martin van Gelderen & Quentin Skinner (eds.), Republicanism: A Shared European Heritage, vol. 1: Republicanism and Constitutionalism in Early Modern Europ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p. 289-306; David Armitage, “Empire and Liberty: A Republican Dilemma,” in Martin van Gelderen & Quentin Skinner (eds.), Republicanism: A Shared European Heritage, vol. 2: The Values of Republicanism in Early Modern Europ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p. 29-46; André Holenstein, Thomas Maissen & Maarten Prak (eds.), The Republican Alternative: The Netherlands and Switzerland Compared (Amsterdam: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08).

20) Istvan Hont, Politics in Commercial Society: Jean-Jacques Rousseau and Adam Smith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21) <사회계약론>, p. 53.

22) <사회계약론>, p. 65.

23) <사회계약론>, p. 65.

24) <사회계약론>, p. 63.

25) Donald Desserud, “Commerce and Political Participation in Montesquieu’s Letter to Domville,” History of European Ideas, 25:3 (1999), pp. 135-151; Istvan Hont, Jealousy of Trade: International Competition and the Nation-State in Historical Perspective (Cambridge, MA: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Béla Kapossy, Isaac Nakhimovsky & Richard Whatmore (eds.), Commerce and Peace in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26) J. G. A. Pocock, Virtue, Commerce and History: Essays on Political Thought and History, Chiefly in the Eighteenth Centu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Minchul Kim, “Volney and the French Revolutio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79:2 (2018), pp. 221-242.

27) Richard Whatmore, “Shelburne and Perpetual Peace: Small States, Commerce and International Relations within the Bowood Circle,” in Nigel Aston & Clarissa Campbell Orr (eds.), An Enlightenment Statesman in Whig Britain: Lord Shelburne in Context (1737-1805) (Woodbridge: Boydell & Brewer, 2011), pp. 249-273.

28) <사회계약론>, p. 66.

29) <사회계약론>, p. 110.

30) Richard Tuck, The Sleeping Sovereign: The Invention of Modern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31) <사회계약론>, p. 84; Till Wahnbaeck, Luxury and Public Happiness: Political Economy in the Italian Enlighten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John Shovlin, The Political Economy of Virtue: Luxury, Patriotism, and the Origins of the French Revolution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6); Richard Whatmore, “Luxury, Commerce, and the Rise of Political Economy,” in James A. Harris (ed.), The Oxford Handbook of British Philosophy in the Eighteenth Centu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pp. 575-595.

32) <사회계약론>, p. 85.

33) <사회계약론>, pp. 86-88.

34) <사회계약론>, pp. 91-93.

35) <사회계약론>, pp. 113-115.

36) <사회계약론>, pp. 116-118.

37) <사회계약론>, p. 120.

38) <사회계약론>, p. 66.

39) Richard Whatmore, Against War and Empire: Geneva, Britain, and France in the Eighteenth Century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12).

40) <사회계약론>, p. 120.

41) <사회계약론>, p. 173.

42) Béla Kapossy, “The Sociable Patriot: Isaak Iselin’s Protestant Reading of Jean-Jacques Rousseau,” History of European Ideas, 27:2 (2001), pp. 153-170; Richard Whatmore, “Rousseau’s Readers,” History of European Ideas, 27:3 (2001), pp. 323-331; François Quastana, La pensée politique de Mirabeau (1771-1789): “républicanisme classique” et régénération de la monarchie (Aix-en-Provence: Presses universitaires d’Aix-Marseille, 2007); Pierre Serna, Antonelle: Aristocrate et révolutionnaire (Arles: Actes Sud, 2017); Minchul Kim, “Pierre-Antoine Antonelle and Representative Democracy in the French Revolution,”History of European Ideas, 44:3 (2018), pp. 344-369; id., “Condorcet and the Viability of Democracy in Modern Republics, 1789-1794,” European History Quarterly (2019, under production).

43) <사회계약론>, pp.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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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도(l'extrême centre) 개념

"극중도(l'extrême centre)"는 현재 파리 1대학 프랑스혁명사강좌주임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 교수가 2005년에 낸 책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라자르 카르노를 비롯해 현 프랑스의 "기술관료지배"를 만들어낸 1789-1830년 혁명세대의 몇 가지 사상적 조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카르노, 콩스탕, 레알, 당글라, 보나파르트 그리고 그밖에 수십 수백의 추종자를 거느린 이념이자 입장으로서, 극중도는 왕당파도, 완고한 보수주의도, 급진적 민주주의도 거부하고, 국가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길러낸 초엘리트가 인민을 계도하고 인민에게 봉사하되 인민의 통치를 결코 받지 않는 정치를 가리킨다.
극중도의 이념은 온건한 개혁을 통한 단선적이면서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법률과 행정을 통한" 진보를 추구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의회와 토론이 아닌 행정부와 실행력이 전진의 동력이다. 그래서 극중도는 진보와 보수의 모든 준동을 때에 따라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국가폭력으로 찍어누르고 엘리트가 규정한 부국강병 및 점진적인 인류진보의 전망에 따라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며, 세르나의 표현으로는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이념과 논의도 허용하지 않는" 국가이념이다. 
따라서 버크식 보수주의나 로베스피에르식 진보주의의 프레임으로는 극중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카멜레온처럼 피부색을 바꾸는 팔랑개비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 뿐이다. 극중도는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세르나가 볼 때 20세기 후반까지도 프랑스를 지배한 국가사상의 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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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TV/설민석)>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선을 넘는 녀석들>이 말하는 ‘프랑스혁명사’ 
김대보  한국교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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