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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통치기 소련에서의 ‘가난의 위계’, 그리고 생존전략과 시장

스탈린 통치기 소련에서의 ‘가난의 위계’, 그리고 생존전략과 시장



시골의 기근

1930년대 이전까지는 위기가 닥치면 도시민들이 교역과 생존을 위해 시골로 갔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는 시골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식량과 생필품의 배급이 시골보다 인구가 적은 도시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도록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골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농촌에서는 집단농장, 소비에트 관료, 교사 등을 가리지 않고 식량과 물자가 부족했다.

産業前衛의 특권이라는 환상

도시라고 해서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도시의 산업전위대라 불린 노동자들을 위한 차별화된 서비스들이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가난의 위계’를 가리는, 때로는 심지어 어떠한 계층화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빈곤수준을 가리는 덮개에 불과했다. 목표치를 초과달성한 노동자가 받는 부가적 배급이라 해봤자 고작 배추국물이었다. 노동자 가정의 식단은 그 질이 크게 저하됐다. 노동자 가정이 받는 배급은 서로 차이가 있어서 위계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다들 너무 가난해서 ‘가난의 위계’에 불과했다. 육류 배급은 전적으로 상징적이었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은 하루에 육류 10그램을 배급 받았다. 산업노동자들은 학생이나 사무노동자들보다는 더 많이 배급받았지만, 그래봤자 생존에는 불충분했기 때문에 별도로 시장거래에 의존해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사람들은 식량이 아닌 장작, 비누, 옷과 같은 다른 생필품들도 상당부분 시장에서 조달해야 했다. 주거도 매우 부족해서, 침대도 시간제로 나눠 써야 했다. 주거에서 산업노동자들은 우선권을 가졌지만, 주거가 워낙 부족해서 이 우선권도 유명무실했다. 이와 같은 환경은 反체제 감정을 고양시켜서 파업이나 좀도둑질이 일어나기도 했다.

엘리트의 물질적 조건

黨간부 및 엘리트는 일반인에 비해서 더 풍부한 배급을 받았다. 그러나 스탈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어쨌거나 배급에 의존해서 삶을 꾸렸다. 국가가 그들에게 주거부터 식량까지 모두 제공했지만, 원칙상 재산이 없었고 은행계좌도 없었으므로 국가의 지원이 끊기면 바로 일반인과 같은 처지가 됐다. 식량이 충분했다 하지만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쳤다. 주거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스탈린의 ‘스파르타式’ 실내가 일반적이었는데, 여기서 사치품이라고는 소파뿐이었다. 여행도 모두 公務에 의한 것뿐이었고, 휴가 삼아 놀러다니지도 못했다.

“사회주의에는 적응하기 어렵구만” : 가난의 위계 속 외국인들

소련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들은 소련시민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불충분하고 미약한 배급이었다. 그래서 외국인들도 시장에 의존해서 생활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헌신 없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소련에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돈을 모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소련 당국이 硬貨로의 환전을 금지하거나 높은 환율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단 소련 시민권을 획득하면 대개 출국할 수 없게 됐다. 기본적인 물품과 식량의 부족에 시달렸던 1930년대 소련의 외국인들은 일단 출국하면 다시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벼룩시장,” “죽은 영혼,” “공짜 술손님,” “좀도둑,” 기타

소련 시민들은 배급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어서 시장 활동에 의존했다. 상황은 몹시 나빴다. (벼룩시장) 사람들은 쓰다 남은 비누부터 짝 없는 신발까지 모든 것을 교환했다. (죽은 영혼) 고용주들은 이미 퇴직한 사람들을 고용인 명단에서 지우지 않고 보급을 더 많이 받으려 했다. 사람들은 배급카드를 사고팔았으며 위조하기도 했다. 많게는 20장까지 더 집어간 배급카드가 연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공짜 술손님) 어떤 사람들은 특정 사업체에서 일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등록해서 배급을 타갔다. 국가는 이런 위법을 찾아내서 처벌하기 위한 위원회들을 만들었지만 생존을 위한 활동을 근절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먹을 것을 찾아 도시로 이동하기도 했다. (좀도둑) 도둑질이 어디서나 성행했다. 심지어 어떤 자동차 공장에서는 생산라인이 끝나는 곳에서 바로 차가 사라졌다. 암시장도 크게 형성됐다. 모든 시민이 암거래에 참여했으며, 그들은 합법적인 위장용 직업을 가졌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런 위법활동들을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 체제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다.

양배추 생산의 “드네프르 댐”

도시와 공장은 각자 생존을 위해 농장을 매입하고 돼지우리를 만들고 물고기를 양식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식량공급 확보를 위한 농장 운영권이 허가됐다. 공장 식당은 노동자의 식단에서 아주 중요했다. 노동자들은 온 가족을 데리고 식사하러 오곤 했다. 집단농장의 물물교환과 보조적 경제활동이 이 공장 식당 재료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각 사업체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노동시간과 노동량은 상당했다. 그래서 사업체 본연의 생산업무가 큰 손실을 입었다. 협동조합, 학교, 병원 등도 각자 밭을 가꾸고 토끼와 돼지를 키웠다. 도시에서 각 가정은 텃밭을 가꿨다.
1930년과 1935년의 법령은 농민이 크지 않은 텃밭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줬다. 합법적으로건 불법적으로건 농민들은 집단농장 생산물보다 텃밭 생산물을 더 많이 팔 수 있었다. 시장을 지배한 것은 집단농장이 아니라 농민이었다. 시장의 수요가 높아서 가격도 높게 뛰었다. 농민은 이 높은 가격 덕택에 농산물을 판매해서 얻은 현금으로 다른 생필품을 살 수 있었다.
黨 지도부는 私的 경제활동을 제한된 규모로 한정하려 했고, 임노동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시장거래는 국가가 부과한 제한에 복종하지 않았다. 불법 암시장이 성행해서, 인민의 삶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사적 사업의 위장

사적 사업들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적 사업체 외관을 띠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다. 그들은 국가기구들의 위장 아래에서 자라났다. 국립상점들, 국립식당들, 국립뷔페에서 점원들은 협동조합에서 구매했거나 직접 만든 물품들을 사적으로 거래했다. 사적 거래는 집단농장, 적십자, 협동조합을 사칭하면서 이뤄지기도 했다. 배당상점(commission stores)들은 수요가 높은 상품들을 팔아서 막대한 매출을 올렸다. 배당상점들은 국가기구였고 그 이윤은 국가에 귀속되어야 했으나 점원들은 장부를 조작해서 큰 액수를 빼돌렸다. 黨의 감사가 이것들을 적발해내 배당상점의 축소를 권고했다. 그러나 사적 경제활동은 그로 인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소와 수단을 바꾸기만 할 것이었다. 암시장은 기근과 물자부족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암시장을 막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시장을 정상화시키고 사적 사업체들에 더 큰 경제적 자유를 부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암시장과의 전쟁에서 탄압은 무용지물이었다.

경화(硬貨)상점의 유리문 뒤편에서

국가는 아직 사람들이 감춰둔 硬貨를 확보하기 위해 硬貨商店(torgsin)을 운영했다. 소련 시민들은 금보석이나 메달이나 동전으로 지불하는 한 硬貨商店에서 상품을 살 수 있었다. 1932년 10월 이후에는 銀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잘해봤자 해당 硬貨 가치의 25%까지밖에 보상받지 못했다. 게다가 硬貨商店의 상품가격은 폴란드, 독일, 프랑스, 일본, 중국의 상점들에서보다 비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값나가는 물품들을 硬貨商店으로 (기쁜 마음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발적으로 갖고 왔다. 국가는 배고픈 시민들의 硬貨저축을 확보하는 데에 기근을 이용한 셈이다. 투기꾼들은 硬貨商店에 몰려들어서 매점매석을 반복했다. 암시장에서 硬貨商店의 루블화는 그 값이 10배로 뛰었다. 그러나 硬貨商店에도 물품이 무한하지는 않았으므로 때때로 물자가 부족하기도 했다. 음식이 상해서 오기도 했고, 보급이 엉뚱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硬貨商店에 온갖 멋진 것들이 다 있다는 이야기는 1930년대의 신화에 불과하다. 硬貨商店이 농민시장과 같은 다른 요소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자 국가는 硬貨商店의 재조직에 착수했다. 硬貨商店은 소련 시민들에게 문을 닫고 외국인들과의 거래로 돌아섰다.

시장은 중앙집중화된 계획경제 내부에서 발전해 나와서 시민들에게 배급에서 얻을 수 없는 재화를 공급했고 노동을 위한 물질적 자극을 생성했다. 당국의 결정이 아닌 사적 동기들이 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국가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서 “투기꾼들”을 체포하고 보조경제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이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민들의 삶을 위한 물자공급은 국가의 계획경제와 사적 시장경제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글은 Elena A. Osokina, Our Daily Bread: Socialist Distributions and the Art of Survival in Stalin's Russia, 1927-1941 (M. E. Sharpe Inc., 2001)의 제2부 6장과 7장을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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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새로운 의미론에 각인되었다. 즉 이제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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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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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