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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té de salut public 번역어: 공안위원회? 구국위원회?



프랑스혁명기 Comité de salut public (1793~1795; 이하 ‘CSP’)을 ‘공안위원회’라고 번역하는 것은 ‘공안’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갖는 의미를 고려할 때 부적절하며, 대신 ‘구국위원회’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있다. 더 좋은 번역어를 찾기 위한 노력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公과 國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CSP의 ‘public’을 ‘國’으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도 CSP가 수립되었는데, 그 경우에도 ‘구국위원회’라 번역할 수 있을까?


무리다. 그렇다면 사전으로 돌아가보자. 먼저 최근 한자사전에 따르면 ‘공안(公安)’의 첫째 뜻은 “공공(公共)의 평온(平穩)과 안전(安全)”이다. 그리고 혁명기에 출간된 프랑스학사원의 사전(1798~1799년)에 따르면 ‘salut’의 첫째 뜻은 “보존, [혹은] 만족할 만하고 적당한 상태로의 복구”이다. 그 예시들로 등재된 것이

“Le salut du peuple, de la République. Le salut public. Le salut des particuliers. De là dépend le salut de l’État. Je vous en avertis pour votre salut. Il y va de votre salut, du salut de toute votre famille”

이다. “구원”이라는 의미와 그 종교적 예시는 셋째 뜻에 가서야 별도로 나온다. 즉 혁명기 용어로서 salut는 이미 종교적 색채보다는 일상적 안전과 정치적 보존 혹은 복구의 의미가 강했거나 최소한 약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기한 예시들(사전에 있는 예시를 모두 옮긴 것임)을 볼 때 salut가 일신, 가족, 개인, 공공, 국가, 인민, 공화국 등의 다양한 층위에 모두 적용되는 개념이며, 이 층위는 엄연히 구분되는 개념들로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인민의 안위, 국가의 안위, 공공의 안위, 가족의 안위, 개인의 안위는 모두 서로 명확하게건 미묘하게건 다른 것들을 가리키는 기표들인 것이다.

또한 같은 사전에 따르면 ‘public’의 뜻은 “인민 전체에게 속하는 것, [혹은] 인민 전체와 관련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말 그대로 ‘공적(公的)인’ 또는 ‘공공(公共)의’로 번역되는 개념이며, 이때 “공공의 안위(le salut public)”는 “국가의 안위(le salut de l’État)”와 구분되는 개념이었다. 그렇기에 사전에서 다양한 층위의 용례를 열거할 때 함께 (그러나 사이에 “Le salut des particuliers”라는 용례로 거리를 둔 채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공안위원회’라는 번역어를 단정적으로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원래 외국 역사의 기관명과 제도명은 어떤 원칙으로 번역하는가가 논란이 있을만한 문제다. 제도명의 문언적 의미에 충실하게 옮길 것인가, 제도명의 기능적 의미에 충실하게 옮길 것인가, 우리에게 더 잘 들어올 수 있는 말로 풀어서 한자어로 압축해서 번역할 것인가? 독재적 지위를 갖는 확립된 단일원칙은 없다.

언제든 논쟁 끝에 더 나은 번역어가 나온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salut public’의 번역어 문제에서 더 나은 대안을 누군가가 제시하지 못하는 한, 나는 지금으로서는 ‘구국위원회’라는 대안을 택하는 것보다는 ‘공안위원회’라는 번역어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려두겠다. (‘구공위원회’라고 쓸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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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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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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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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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