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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신전


고대 그리스 신전의 유래, 건축물, 주변 환경, 종교의식을 살펴보겠다. 청동기 문명 미노아와 미케네 시대에는 신전이 독립 건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절대군주’가 최고 사제였고, 그의 궁궐 안에 있는 작은 방들이 사원으로 기능했다. 궁궐 바깥에서는 각 가정 내에 숭배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산꼭대기나 동굴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미케네 문명이 끝나면서 이러한 숭배공간도 사라졌다. 그리고 기원전 8세기에 독립된 건물로서의 신전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제의 공간이 실내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지역에서 야외 제단이 숭배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신전 내부는 신의 거처이자 신상을 모시는 곳이었으며, 제의는 신전 바깥에서 진행되었다. 신전이 독립적으로 건축된 것은 제의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폴리스의 융성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한다. 政體가 군주정에서 귀족정으로 변하면서, 예전에 왕을 모시는 건축물에 들어가던 노력이 이제 신전 건립에 투입되었다.

가장 잘 보존된 초기 신전은 크레타에 남아 있다. 그리스 본토의 초기 신전은 크레타에 비해 보존상태가 비교적 열악한데, 이는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진흙벽돌을 썼기 때문이다. 페라코라에 있는 헤라 신전의 황토 모형을 보면 초기 신전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신전이 커지면서 재료도 점차 더 무게를 잘 견딜 수 있고 비바람을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사모스의 헤라 신전은 사모스라는 폴리스의 세심한 기획에 의한 것으로, 도시에서 도보로 한 시간 거리에 세워졌다. 이 신전은 주민들의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홍수로 파괴되어 재건되었는데, 새로이 만들어진 공간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건축물은 미술로서 재탄생했다. 기원전 600년경에 건립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에서는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지만 여전히 돌은 신전의 토대에만 사용되었고, 기둥과 벽에는 나무와 진흙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케르키라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전적으로 돌을 사용한 건축물이었다. 그 후 3세기 동안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 신전의 외부 기둥과 내부 공간의 배치 비율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신전의 모습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제 신전의 위치와 제의를 살펴보자.

프리엔의 아테나 신전은 도시계획과 함께 언덕 위 높은 곳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에 세워졌다. 프리엔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의 척도에 맞춰 설계되어서 억누를 듯이 거대한 구조물이 없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은 올림피아의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다. 이곳은 올림픽 경기의 주 무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하는 제우스 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제우스 상이 있던 자리가 내부 공간cella 길이의 1/3을 차지했고, 스트라보에 따르면 “제우스 상이 일어섰다면 천정을 뚫었을 것”이다.

올림피아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아카디아의 아폴론 신전은 지금은 홀로 서있지만 예전에는 그 주변에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신 아폴론의 신전답게 갖가지 무기가 바쳐졌다. 이 신전은 기둥의 형태나 프리즈 벽화가 특이해서 잘 알려져 있다.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전에서 최고의 신비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지금 이곳은 일대의 공장과 산업시설 때문에 관광객들이 회피하게 되었지만 신전 내부를 둘러보면 주변의 불쾌한 환경을 잊고 고대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이 신전의 각부는 데메테르 신화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데메테르 신상이 있었다. 3단계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비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밖에도 코스 섬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치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밀레토스 지역의 아폴론 신전은 (별도의 폐쇄공간은 아니었던) 금지구역adyton을 지나는 통로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금지구역에서는 신탁의 샘 곁에 여자 예언자가 앉아 있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은 신탁으로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다. 엘레우시스의 비의와 달리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얻기 위한 절차에는 비밀스러운 것이 없었다. 고대에 델피의 아폴론 신전은 연중 아흐레 동안만 입장을 허용했고, 그것도 선금을 지불한 신탁 요청자에 한정되었다.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 신전의 주제는 다양했으며, 특히 내부공간의 설계에서 차이가 있었다. 여러 신전이 다양한 장소에 각기 다른 방식의 제의와 숭배를 위해 세워졌다.

출처 : J. N. Coldstream, “Greek Temples: Why and Where?”, in Easterling & Muir (eds.), Greek Religion and Society (Cambridg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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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필요로부터 해방된 욕망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주의적 판본에 불과하다. 욕망 기제는 무엇보다도 소비 기제인 것이다. 필요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 역사를 갖고 있다. 레옹 왈라스는 노동가치론을 한계효용가치론으로 대체하면서 객관적 가치를 주관적 가치로 대체했고, 샤를 지드는 ‘욕망치(desirability: 얼마나 바랄만한가,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효용(utility)’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객관성의 냄새를 제거했다. 푸코는 1970년대 말에 혁명이 아직도 바랄만한 것인지(still desirable) 질문함으로써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 II >
얀 파토치카는 바로 혁명이라는 관념 자체에서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을 본다. 샤토브리앙의 ‘혁명들’은 한나 아렌트에서 단수형 ‘혁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새로운 의미론에 각인되었다. 즉 이제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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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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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는가를 둘러싼 20세기의 역사학계 논쟁에 대한 필립 미나르(Philippe Minard)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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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루스(Ernest Labrousse)는 1953년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부터 부르주아의 대두가 다시 시작됐는데, 수가 증가하고 더욱 큰 부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성실하고 근검절약하고 가족을 아끼는 탄탄한 덕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고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는데, 하나는 ‘권력 재분배’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자유화’였다. “더 부유해지고 수도 늘어나고 더욱 훌륭하게 교육받은 데다 도시에 모여 살며 밀접하게 접촉했던 부르주아가, 가장 대의제적이었던 환경에서,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자의식은 귀족과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장애물은 커져만 갔으니......” 그래서 라브루스는 최종적으로 1788년의 부르주아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계급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