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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종교


고대 그리스에서 종교란?

고대 그리스 종교를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다른 문화와 시대의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함정이다. 이런 함정으로 ‘해독’의 자세도 들 수 있다. 즉 그리스 종교를 해독해서 우리의 ‘자연적 언어’로 바꾸면 그 ‘참된 뜻’을 알게 된다는 자세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그리스 종교를 ‘말이 되게’ 만들려는 시도는 위 맥락에서 온갖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방대하고 분산적인 그리스의 종교를 단일한 실체로 볼 수 없으므로 통일된 의미의 ‘말이 되게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거대한 분산체계를 우리 방식대로 구성하고 합친 다음에 그것을 단일한 ‘그리스 종교’라 부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각각의 제의나 신화에 대한 개별적 설명만이 가능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 종교라는 것이 당대 그리스인에게조차 문학적 장치와 미신으로만 기능했을 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학부생과 심지어 학자들조차 이런 시각을 견지한다.

그리스 종교에 접근하면서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미신’과 같은 부분과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부분을 나누어 보려는 시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종교를 흔히들 그러듯이 ‘非과학’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다른 문명의 종교적 믿음, 제의, 심성을 자신의 관점에서 ‘非과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프레이저부터 에반스-프리차드에 이르기까지 원시종교 연구를 방해해왔다. 에반스-프리차드는 ‘과학’이 ‘상식’을 방법론적으로 더 엄밀하게 밀고 나간 것일 뿐이므로 원시종교의 ‘비과학성’은 우리의 ‘상식’만 적용시켜봐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객관적 현실’이라는 관념에 대한 철학적 반박을 들이댈 필요도 없이 에반스-프리차드 자신의 연구로부터 이미 잘못임이 드러난다. 원시종교는 그 사람들의 일상과 세계관에 불가분으로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족지 연구자조차 때때로 그 ‘바깥에서 사고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문화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종교를 실증적 관찰로써 반증할 수는 없는 법이다. 종교는 언어처럼 문화적 현상이다. ‘사적’ 언어가 없듯이 ‘사적’ 종교도 없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 동일한 세계를 그저 다른 종교의 이름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도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 종교는 경험의 양태이자 혼돈으로 가득 찬 生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해야 한다. 인간은 혼돈을 견딜 수 없으므로 종교를 통해 부조리와 혼돈을 설명하고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리스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이 외부세계를 경험하고 그것에 종교적 사유와 행동의 조직으로써 제도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 우리와 매우 달랐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고대인의 삶은 손쓸 수 없는 흉작과 질병으로 언제나 고되고 위험했다. 일상적 질병도 치명적인데다 때때로 찾아오는 지진이나 역병도 파괴적이었다. 혼돈의 위협을 가까이 느끼는 만큼 종교도 필요했다. 딩카족의 사례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심성에도 잘 적용된다. 그들은 인간행동의 괴이함이 신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 꿈이나 역병도 신성의 ‘표식/징조sign’일 수 있었다. 믿기 힘든 일이나 기이한 일은 그것이 대사건이건 사소한 일이건 종교적 틀 속에서 설명되었다.

그리스 종교에는 기독교와 달리 ‘하느님의 말씀’도, 십계명도, 계율도, 이단도, 종교전쟁도 없었다. ‘진짜 신’과 ‘가짜 신’도 없었고, ‘종말’과 ‘최후의 심판’도 없었다. 그리스 종교에는 ‘축복’, ‘죄’, ‘신앙’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개념들을 그대로 대입시킬 수 없다. 그리스인은 신을 ‘믿는다believe in’기보다 ‘인정recognize’했다. 그들에게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없었고 조직되고 영속적인 실체로서의 교회나 사제단도 없었다. 피티아처럼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몇몇이 있었을 뿐이다. 사제단은 훈련을 통해 길러지지 않았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모든 변화를 막았기 때문에 성인과 순교자만이 추가될 수 있었던 기독교와 달리, 그리스 종교는 거대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즉흥적improvisatory’이었다. 기존의 제의와 신화는 언제나 즉흥적 보충 및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었다.

그리스 종교에 체계가 없지는 않았다. 기독교에서처럼 정해진 기도서는 없었지만 호메로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글에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스타일의 기도와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들은 대개 신을 직접 호명했고, 호명의 언어는 공손했다. 신과 기도자 사이의 의무 관계와 끈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핵심적이었던 ‘상호성reciprocity’ 때문이다. 사태의 변화는 항상 반작용과 균형을 불러오는 법이므로 신이 개입해줄 것이라는 믿음 혹은 당위성이 ‘기도문’들에서 드러났다. 이런 사고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에서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나타난다.

제물을 바치는 제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책 16~18쪽), 그리스인도 그 중 하나를 특정할 수 없을 것이다. 희생제의는 인간과 신의 공동식사, 신에 대한 인간의 음식 공여, 식사준비과정 자체의 신성화 및 제물화, 의식과 제물 공유를 통한 공동체 쇄신, 살해를 통한 금기 파괴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복합적으로 띠었다. 그러나 이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미사에서 포도주와 빵을 구세주의 피와 살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행위나 구세주가 처녀잉태로 탄생했다고 믿는 것도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리스 종교에서 제의는 신과의 소통행위였다. 그런데 그리스 제의의 전반적인 성격으로 봐서 신은 질서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무질서의 원천인 성격이 더 강했다. 또 제의는 질서의 정지이자 사회적 정상성의 전복이라는 성격을 가졌다.

신적인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달리 모호한 기호와 다의성으로 가득했고, (헤로도토스의 저술에서 드러나듯이) 신적인 능력을 갖추어 미래를 예언하고자 하는 인간은 ‘신적인 언어’로 말했다. 신들은 복수성과 다양성을 보이면서도 하나의 ‘전체’이자 ‘집합’을 형성하는 측면도 있었다. ‘신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를 주축으로 하는 이 ‘집합’은 가족이라는 모형을 활용하면서 통일성과 분쟁ㆍ갈등이 공존할 길을 열어준다. (그리스 종교 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호메로스의 글에서처럼) 각각의 신은 대부분의 경우에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보여준다. 다만 그들은 인간보다 강하고 아름답고 크고 자신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며 영생하는데, 이것은 인간과 신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로 작동한다. 《일리아스》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죽음으로 이끄는 아폴론은 ‘달려드는 戰神처럼,’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서’ 나타난다. 아이스킬로스 극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과거의 힘에 관한 주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과거가 계속 현재를 따라다니지만, 종국에 극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과거가 아니라 아주 먼 옛날의 신적 과거로부터 온 존재들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신을 마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를 마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마주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즉 신은 파괴적으로 이질적이고 불가능하고 신비로우면서 동시에 부정할 수 없게 ‘거기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의지로 쫓아버릴 수 없는 존재다. 아프로디테든 디오니소스든 신의 복수는 무시무시하며 피할 수 없다. 이런 어두운 신적 면모는 동물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半神半人처럼 나타나는 오이디푸스도 위 설명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는 신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데도 신성이 항상 배후에서 작동하면서 ‘인간의 세계’와 대비를 이룬다.

신성은 질투가 많고 무질서하다. 신성은 질투가 많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하지만 무질서하므로 인간의 질서가 이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차원에 있다. 신성의 본질은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인간경험들의 공존에, 즉 예측가능한 것과 예측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공존에 있다. 신이 인간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졌다 해도 필연적으로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면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에 지나지 않는 신은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아무 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그것은 종교가 아닐 것이다. 그리스 종교는 사물의 설명 가능한 외연을 확대하고 그리스인이 세상을 이해하는 전제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사회 저변의 구조적 긴장도 보여준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요약) : John Gould, "On Making Sense of Greek Religion," in Easterling & Muir (eds.), Greek Religion and Society (Cambridg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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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노선(Lignes)>誌는 2001년 2월호에서 ‘혁명의 욕망’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구성했다(참여 저자: Étienne Balibar, Jean Baudrillard, Daniel Bensaïd, Sylvain Lazarus, Michael Löwy, Edgar Morin, Jean-Luc Nancy, Enzo Traverso, Paul Virilio 등). 혁명의 욕망인가, 필요인가? 이는 생기 넘치는 욕망 같지만, 사실은 무덤의 헌화 같은 씁쓸한 향내를 풍기고 있다. 초창기의 추진력과 열정이 쇠진한 잔여물이 바로 욕망과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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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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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1989년 일련의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가 가져온 냉전의 종식은 불가역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진으로 여겨졌지만, 그 주된 의미를 민중참여와 민주주의의 관점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시장이 이행의 주된 척도를 제공한 것이다.

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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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