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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 : 아르테미스 / Ἄρτεμις / Artemis


아르테미스 / Ἄρτεμις / Artemis

소아시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리디아와 리키아의 신들 중에도 비슷한 이름을 가진 신이 있다. 아르테미스는 오래전부터 널리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리아스에서 동물의 신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아르테미스에게 핵심적인 성격으로 간주된다. 아르테미스는 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신일뿐 아니라 동물을 사냥하고 때때로 가차 없이 죽이기도 하며, 사냥과 사냥꾼의 신이기도 하다.

처녀성의 신이기도 한데, 언제나 님프에 둘러싸야 사냥하고 춤추며 산과 들판에서 노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다. 처녀성은 무성성(asexuality)이 아니라 특이하고 특이하고 성애적이도 도전적인 이상을 표현한다. 아르테미스와 님프로 상징되는 처녀성, 산과 들판, 사냥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아르테미스의 가호를 얻기 위해서는 사냥꾼이 금욕적이고 정숙해야 한다. 히폴리토스는 그러한 사냥꾼이어서 아르테미스의 목소리를 듣는 은총까지 받았다.

아르테미스와 그 수행원들의 그림 같은 묘사는 제식과도 관련이 깊다. 카랴이의 춤추는 소녀들은 전설이면서 동시에 현실이었다. 결혼할 나이가 된 소녀들은 아르테미스를 기리는 축제에서 함께 춤을 추었는데, 사실 이것은 젊은 남자들이 그들과 친해질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아폴로가 페스트의 신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신인 것처럼, 아르테미스는 처녀성의 신이면서 동시에 출산의 신이었다. 분만 중에 죽은 산모는 아르테미스의 희생양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분만의 고통이 끝나는 것도 아르테미스 덕분이었다. 이러한 연관 하에서 아르테미스는 결혼식에서도 빠질 수 없는 신이었다. 아르테미스는 소녀의 삶의 결정적 전환점에서 위험들을 미리 쫓아버리는 힘을 갖고 있었다.

출처 : Walter Burkert, Greek Religion: Archaic and Classical (Oxford: Blackwell,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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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