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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 : 아폴론 / Απόλλων / Apollo


아폴론 / Απόλλων / Apollo

‘가장 그리스다운 신’으로 알려져 있다. 유년의 이상으로도 유명하지만, 완숙한 성년의 모습도 다른 어느 신 못지않게 대변했다. 유년이 이상적인 것으로 그려졌다는 것에서부터 그리스 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아폴론 숭배는 그리스 세계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국가적 숭배와 사적 숭배를 아울렀다. 중요한 신전들, 초기의 신전들이 아폴론을 모셨다.

숭배중심지가 두 군데라는 점이 특이한데, 이들은 델로스와 델파이였다. 델로스는 그리스 세계의 중앙시장과 같은 곳이었고, 델파이는 신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아폴론 숭배는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시대를 맞아 서쪽으로는 시칠리아까지, 동쪽으로는 아조프해까지 퍼졌고, 여러 도시가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문헌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기원전 700년경에 아폴론 숭배의 전파는 이미 완성돼 있었다. 서사시에서 아폴론은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였다.

델로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은 아르테미스였고, 최초의 신전도 아르테미스를 위한 것이었다. 아폴론 신전은 델로스 주변부에 있었다. 델파이에서는 기원전 8세기 이후 아폴론이 중심이었다. 아폴론이 소아시아에서 유래한 리키아의 신이라는 추정이 있다. 호메로스의 시에서 아폴론은 그리스의 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지식이 축적되면서 적어도 아폴론이라는 이름은 히타이트나 리키아의 언어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름이 아닌 신 자체는 여전히 소아시아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단 이 신, 숭배문화, 신화가 수입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폴론의 찬송가는 paean이다. 그리스 치하의 크노소스에서 Paiawon은 독립적인 신이고, 일리아스에서 Paean은 여전히 아폴론과 구분되지만, 동시에 paieon은 아폴론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찬가로 등장한다. 신과 찬가의 밀접한 연관성은 미노아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통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아폴론은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닌다. 일리아스에서 아폴론의 화살은 페스트를 의미한다. 치료의 신이 질병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셈족의 신 레셉과 유사하다. 그러나 아폴론이 레셉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아폴로는 시인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했다. 아폴론은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질병의 신이면서 동시에 리라를 연주하는 음악과 시의 신이기도 했다.

활은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다. 아폴론은 항상 리키아나 기타 ‘먼 곳’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델로스에서조차 축제에서 아폴론을 매번 새로이 불러 모시곤 했다. 활의 신은 무시무시했다. 아르테미스의 도움으로, 그는 자식 자랑을 해서 레토를 화나게 만든 니오베의 자식 14명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아킬레스도 아폴론의 화살에 죽는다. 아킬레스가 한창의 젊음을 뽐낼 때 아름다운 젊음의 신 아폴론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그 ‘근접성’이 상징적이다. 아폴로 축제에서도 아폴론의 음악은 항상 소년소녀들의 합창으로 나타난다.

치유능력은 아폴론 숭배의 핵심적인 성격이다. 아폴로는 마법의 신이 아닌 ‘정화와 신비로운 신탁의 신’이다. 치유나 정화를 원하는 자는 신탁을 해석해서 질병이나 타락의 원인을 밝혀내고 새로운 행동으로써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따라서 신탁과 치유는 떼놓을 수 없었다. 치유를 위한 원인규명은 신적인 통찰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고대에는 신탁이 아폴론의 명성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크게 기여했다.

계속해서 “먼 곳에 있는 신”으로 남았으며, 이 우월한 신은 그를 섬기건 안 섬기건 모든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를 찾는 인간은 더 고귀한 것, 절대적인 것을 찾아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간은 아폴론에게서 빛을 구했으며, 그런 한에서 기원전 5세기부터 그가 태양의 신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일관성이 분명하다.

출처 : Walter Burkert, Greek Religion: Archaic and Classical (Oxford: Blackwell,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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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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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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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이후에 민주주의 개념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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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후 정치의 공적 언어에서는 허용되는 주장과 신념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붕괴는 케인즈주의로부터의 황급한 후퇴와 탈규제 추세를 강화시켰고, 공공재에 대한 경시를 부추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체의 옹호를 배척하는 방향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진영의 현실적인 경제적 강령이 고갈된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모형은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했고, 각종 조치와 협정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 부르는 추세가 강화됐다.

현재의 담론에서는 민주화보다 시장이, 그리고 인간 행위자들의 집단적 작용보다는 시장세력의 승리가 변화의 원동력이자 진보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는 힘이며 사태를 정당화하는 논변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장의 힘은 각국 정부가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범위에, 특히 예전 민주주의 기획의 케인즈주의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성향에 제약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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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석 도식은 1930년대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나 1965~66년의 (‘젊은’) 퓌레와 리셰(F. Furet & D. Richet)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대혁명은 나눌 수 없는 쌍으로 인식되는 ‘부르주아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출현’의 거대서사에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1970~80년대에 격론이 일었는데, ‘사회사’는 이로부터 얻은 것이 전혀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심지어 ‘자코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정통해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일어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 운용됐다는 관념은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바르나브(Barnave)에게서 발견되며, 이후 토크빌, 미녜, 기조, 티에리, 텐에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구체제의 폐허 위에 건설된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프랑스’라는 관념을 왕정복고시대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서 가져왔다. 만일 ‘정통해석’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모라제(Charles Morazé)의 1957년 글과 퐁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