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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트윗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의 원래 역사적 맥락


홍세화씨가 5월 24~25일에 트위터에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원어: Toute nation a le gouvernement qu'elle mérite)라는 인용구를 포함한 글 몇 건을 올려 왜 꺼진 불을 다시 들쑤셔 되살리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심지어 한겨레 전화번호와 함께 올려서 뜻하지 않게 한겨레 안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탄식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의 글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 트윗의 함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터넷에서 논의되고 있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다만 역사가의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인용된 문구의 맥락을 여기 적어둔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프랑스혁명기에 유명해진 가톨릭 왕당파 지식인이자 정치인이다. 정치적 스탠스를 요즘 정치판에 굳이 비교하자면 '자유한국당+보수기독교'보다도 더 우파다. 아마 오늘날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스탠스일 것이다. 프랑스인은 아니며, 인용된 문구는 드 메스트르가 조국인 사르데냐 왕국을 대표해서 러시아 궁정에 파견 가 있던 시절인 1811년 8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 기사(귀족에 대한 호칭)님께" 보낸, 훗날 수취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상태로 전집과 서간집에 포함되어 출판된 편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중세와 근대 초기 프랑스 및 여러 유럽 국가들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국왕이 아무리 좋은 개혁을 해도 해당 민족의 수준이 그 개혁을 받아들일 정도로 깨어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관점에서, 러시아 황제들의 개혁 정책이 러시아 민중의 우매함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취지의 정세 분석이다. 러시아를 상당히 깔보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드 메스트르는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는 것이 "수학적 진리"나 마찬가지로 정확하다고 주장하며, 러시아 정부가 여전히 전제정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격언"에 비추어보건대 러시아 인민이 너무나 미신적이고 무지몽매해서 그 정부를 서유럽처럼 바꾸고 개혁법안을 만들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롭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 문구의 맥락은 국민이 멍청하다면 좋은 정부와 좋은 법이 소용없을 뿐더러 오히려 국가에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드 메스트르는 저 편지를 쓰기 전에나 후에나 한결같이 프랑스혁명이 무지몽매한 인민의 폭력적 봉기로 인해 저 끔찍한 "민주주의"를 건설했고 "신성한 종교"를 파괴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악몽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다. 물론 드 메스트르는 인민이 그런 이해력조차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전반적 사상의 핵심은 곧 인간은 나약하고 악하므로 종교와 군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인용구를 담고 있는 원사료는 국민의 평균적 수준이 낮을 때에는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무용하고 해롭다고 주장한다. 진보에 반대하고 인간을 불신하며, 세계는 원래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이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하기보다는 생긴 대로 살면서 종교생활만 경건하게 하고 윗사람(지주, 사장, 귀족, 왕, 사제 등)에게 충실하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진보지식인 홍세화씨가 드 메스트르를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는 점이 의아하다. 제대로 알고 쓴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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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