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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의 훈계에는 더 이상 계몽의 효과가 없다. 랑시에르, 민주주의, 설득과 계몽에 관해.

1.

자크 랑시에르가 평등한 지적 능력을 전제해야만 평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모두에게 평등한 목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는 이 민주적 정신을 모든 영역(정치, 사회, 교육, 미학 등)에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무지한 스승>에 등장하는 자코토의 '가르침 없는 배움'은 그러나 사실 학교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가정, 군대, 학교, 학문('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 영역들에서 "민주적 절차"는 부수적인 요소로서 도입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영역들이 작동하는 핵심 원칙에는 침투하지 않는다. 그런 침투가 발생한다면 그 영역들이 지금까지 기능해온 방식은 붕괴할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교육할' 수 없게 되고, 장교는 사병을 '지휘할' 수 없게 되고, 교사는 학생을 '가르칠' 수 없게 되고, 기존의 다수설을 깨는 '진실'을 밝혀낸 학자는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정, 군대, 학교, 학문이 완전하게 "민주화"되면 사실 우리가 아는 가정, 군대, 학교,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심하게 변형된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은 유토피아 문학에 자주 등장한다. (절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니다. 현재 상식적인 선에서 상상되는 가정, 군대, 학교, 학문과 그것들의 기능은 그 핵심이 민주적이지 않을 때에만 유지된다는 의미다.)

과학동아나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학술지가 아닌, 정치적 언론은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한겨레, 경향, 조중동 모두 정치적 언론이다. 그들이 다루는 이슈는 (사회/경제면조차) 대부분 상식적인 의미에서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정치체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 이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언론은 독자에게 꼰대짓을 할 근거도 명분도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이 ‘정치’가 원칙상 비민주적이고 비정치적인 하위 조직들(경찰, 학교, 사법기관, 병원, 감옥, 군대 등)을 통제한다. 민주주의는 진리를 담보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진리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대규모 공동체가 의사결정을 할 때 가장 덜 편향되고 가장 덜 불공정한 의사결정을 지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인간계에서 발견할 수 없으므로) 차악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확실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설득은 하되 훈계는 통하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말은 그것이 놓인 맥락에 따라 다른 목소리와 다른 힘을 얻는다. 과거 군주정 또는 대의제엘리트정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침투하고, 민주주의의 급진적 원칙이 약 100년에 걸쳐 천천히 정치의 핵심에 침투해 들어간 결과가 오늘날 인터넷과 결합하여 여러 새로운 현상들을 불러왔다.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일상의 삶을 살면서 아이들 키우고, 부부 간에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 이런 사람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 서민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대통령 되기 전의 노무현)

우리는 세계적으로 이것이 레토릭을 넘어서 현실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현실은 시궁창"이고 대의제 엘리트통치는 견고해보이지만,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 견고한 성채가 무너지고 있다.

아예 대놓고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거부하는 사람을 나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좀 피상적으로 말해보자면, 민주주의는 어떤 것과도 결합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가장 끔찍한 불의와도, 핵전쟁과도, 잔인한 고문과도 결합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가장 잔혹한 자본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고, 가장 극단적인 공산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 사회경제 체제들도 민주주의 아닌 정치체제들과 결합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 정체가 다른 정치체제에 비해 자정능력이 뛰어나므로 이런 끔찍한 효과들을 낳을 확률이 차라리 가장 낮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자다. 정치사에서 반작용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집단지성의 자정작용을 전혀 믿지 않았던, 인민이 “흉포한 짐승” 또는 “문명화시켜야 할 야만인”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었던 시대의 엘리트는 아주 약간의 민주적 일탈에도 커다란 공포를 느꼈기에 보통선거권을 오랫동안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나는 걱정을 덜 하고, 차라리 구체적인 전략을 고민하는 데 그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민주주의'만으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여기서 언론, 지식인, 운동가, 그리고 나아가 정치인이 할 일이 많다.

정희진은 5월 12일 한겨레 칼럼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에서 약자를 위한 강자의 '셀프공부'를 주장하고,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설득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모욕적인 차별"이라고 분개하면서 "나는 더 이상 이런 ‘마주함’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겐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원문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529.html) 나는 정희진의 사고방식이야말로 현실성 없는 냉소주의라고 생각한다. 영남에서 지역주의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아둔한 고집을 깨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을 이해하며 숱한 세월을 쏟아부어 그들을 설득해내야 했던 노무현과 김부겸의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4월에 잠시 국민적 이슈가 될 뻔 했던 동성혼 문제를 예로 들면, 현재 국민 여론이 동성혼 합법화에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기자들이 국민들에게 "야 이 바보들아, 동성혼은 합법화하는 게 정의로운 것이야"라고 훈계하면 합법화의 날은 더욱 더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물론 독자/인민이 아니라 정치인 문재인을 상대로 하는 비판/훈계는, 민주당이 표심을 의식해야 한다는 전술적 고려와 별개로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유효하기도 하다.) 문화적 보수주의자 혹은 상당수 기독교인이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무리 어처구니 없어보여도,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왜’ 반대하는지를 추상적인 논리 차원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가 스스로 "아 동성혼을 합법화 하지 않아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상처를 입고 힘들게 사는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삶의 '이야기'가 담긴 기획/르포 기사들을, 이를테면 길지 않게 써서 시리즈로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꼰대짓 하지 않는 계몽주의, 즉 인민을 훈계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내야 할 평등한 동지로 대우하는 민주적 설득일 것이고,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것이다.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라는 제목으로 통하는, 안수찬의 탁월한 2011년 4월 기고문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 http://1boon.daum.net/h21/poverty) 이런 기사가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한겨레를 믿는다. (일부 기자들이 억하심정을 풀고 팀킬을 그만두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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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