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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언론과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의 최근 분쟁을 보며

전체 그림은 사람마다 다르게 그리는 건데, 이 전체 그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전체 그림이 안 그려진다. 지금 판이 흔들린 뒤 안정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판이 아직 흔들리고 있다.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다. 그래서 말들이 충돌하고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프랑스혁명기, 보수파에 의해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던 시예스가 경제부처로 밀려드는 청원서를 보면서 "한심한 청원서들을 보내는 바보같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메지라는 정치인이 이를 반박하며 말하기를 "그들이 너희를 선출한 것이다. 고등교육을 거치지 않은 보통사람들이 너희를 선출할 만큼의 지능은 갖췄지만 너희에게 정책 제안을 할 만큼 똑똑하진 않다는 사고방식은 자기모순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사실 이 "자기모순"은 주류 정치사상의 커다란 한 축이다. 현재와 같은 대의민주주의(라고 쓰고 선출제귀족정치라고 읽는다)는 몽테스키외식의 "인민이 통치에 관여할 지성을 갖지는 못하지만 통치할 사람을 고를 지성은 갖는다"라는 주장의 여러 확장된 판본들에 토대를 두고 역사적으로 발전해나왔다.

사람 하나 하나를 놓고 보면 "대통령감"은 잘 없다. 거의 없다. 그러나 집단지성은 어떤 대통령보다도 똑똑할 수도 있다. 아닐 때도 있고. 집단지성의 자정작용과 개선가능성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투표제도까지 포기해야 한다. 그냥 세습군주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사를 비판하는 시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SNS에 폭력적인 글을 올려 난리가 난 것은 해당 기자들이 자초한 것이다. 말과 수의 힘이 합쳐져 점수가 나는 곳에 도전장을 던졌고, 그 경기장의 규칙에 따라 패배한 것이다. 그들도 인정하고 후퇴했다. 나는 이 문제는 고민이 끝났다.

최근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한 여러 시민들의 부정적 반응과 그 시민들을 반짐승으로 간주하는 언론사 상당수 직원들의 관점은 1) 민주정치란 무엇인가, 2) 현재 한국의 민주정치 상황은 어떤 것인가, 3) 시대정신은 무엇이고 역사적 과제는 무엇인가, 4)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와 같은 복잡다기한 문제를 함께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추가로 "문빠"들의 덕질이 있다. 너무 정신분석적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것이 지난 9년간 인간다운 대통령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보상받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게다가 그들이 분노하는 건 단순히 덕질을 방해할 때가 아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부채의식을 찔러서 자극하거나 가뜩이나 여소야대라 걱정인 문재인 정권의 개혁과제들이 또 좌초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사태가 발생할 때이다. 그러므로 덕질 자체는 정치적 역효과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덕질과 그들의 분노가 너무 쉽게 싸잡아 비난 받는다. 사실 그들의 분노는 덕질과 별개로도 충분히 발생하는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과 적폐청산 좌절의 공포)

일단, 시민들이 맞다. 일단, 그들이 맞고,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몰아낸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느끼는 불안감, 걱정, 그런 불안과 걱정에서 나오는 격정을 상수값으로 인정한 뒤에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 격정은 민주적 역동성의 토대다. 그것이 사라지면 국가는 "얼어붙는다."

혐오하지 말고
대화하고
이해해야 한다.

어느 쪽이건.

그리고 이 책임은 지식인과 정치인과 언론에게 더 무겁게 지워지는 것이다.


한겨레가 회사 차원에서 안수찬 도발사태에 대해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이 사과를 받아들일 독자도 있고, 안 받아들일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과가 진심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고 계속 한겨레를 불신하거나 절독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사와 기자들은 그들을 매도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만 언론만큼은 독자들을 상대로 "왜 나한테 매번 트집이냐" 또는 "왜 사과했는데 안 받고 계속 난리냐"라는 식의 생각을 해선 안 되고 글을 써선 더더욱 안 된다. 그런 사고방식은 남에 대한 글을 써서 남들에게 읽혀서 그 영향력으로 먹고 사는 자기 손을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자들이 "문빠"나 "개떼" 같은 표현을 공개된 장에서 쓸 자격이 없는 이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기자들은 그럴 자격이 직업상 없다. 기자직 내려놓고 하면 몰라도.

["마키아벨리언 모멘트(Machiavellian moment)" 혹은 마키아벨리적 계기라는 개념은 지성사학자 포칵(J. G. A. Pocock)이 동료 스키너(Quentin Skinner)의 제안에 따라 1970년대에 정식화한 개념이다. 포칵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동등한 시민들이 '통치하는 동시에 통치받는' 고대의 자유를 누리는 공화국의 가능성이 슬쩍 엿보이는 순간"이자 "이 공화국이 내적 모순들 때문에, 또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들 때문에 취약해 보이는 순간"을 동시에 가리키는 이중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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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