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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바깥에도 세상이 있다. 지방은 어디로 가는가

지방 (혹은 지역) 문제는 주목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전라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게 다가 아니다.
대구는 폐허다. 시간이 멈춘 도시.
부산은? 겨우 숨이 붙어 있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은 점차 수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어간다.
창원, 거제는? 그나마 살아 있었는데 허물어져간다.

이건 그나마 도시 이야기다.

시골로 들어가면 더 말할 수조차 없다.
호남은 말할 것도 없다. 경기도, 경북, 강원도, 서부 경남은?

지금 농촌은 더 이상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로는 조금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도시로 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은 서울에 기생하고, 서울과 함께 웃고 울며,
수도권 바깥의 지방 도시들은 생명줄이 끊겨서
남은 산소로 천천히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서울에 있다.
서울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또는 앞으로의 터전이 확고하게 서울인 사람들은, 한국 바깥의 세계는 보되 서울 바깥의 한국은 보지 못한다.

서구에서 "국민경제"가 탄생한지 300년,
서울 바깥에는 서울의 작고 못난 복사판만이 남는다.

획일화된 간판들, 그 골목 뒷편에는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짝이 달린 가게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지방은 이제 서울에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블로그 먹방에 의존하는 "지역 맛집"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이것은 결코, 결코 지속 가능한 미래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 오건 말건
우리는 지방을 살려야 한다.
지방의 도시가 살고 농촌이 살면 나라의 근본이 고루 펴진다.
서울과 IT와 화려한 국제화는 텅 비어가는 국토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없고

결국 희망찬 마음을 가진 인간이 없는 땅에서
서울을 향해 달리는 KTX만이 시간을 가르는
SF만화가 현실이 될 것이다.

굳이 핵전쟁이 없어도.
이미 서울 바깥은 사라지고 있다.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다. 그러나 파리 바깥에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프랑스가 있다.
런던은 영국이 아니다. 그러나 런던 바깥에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영국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들이 쌓아둔 제국 시절의 물적, 문화적 자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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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자본주의 : 케빈 카터의 사진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에 부쳐

유명한 필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으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경우일수록 그러하다. 대안 없는 비판도 유의미하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이 모조리 그러하다면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모색과 비판의 정교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비판만 할테니 대안은 너희가 찾으렴" 같은 태도는 안 된다.
1. <전 세계에서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다발적,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건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 신앙의 영역이고, 내 판단(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구조는 1%가 아닌 10% 이상이 지지하고 떠받치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정신적 헤게모니를 동시다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핵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만일 지구상 인간 절반 이상이 죽는 대재앙 없이도 전지구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래 2 이하의 글은 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본다.
2. <현 자본주의 사회에 숨어 있는 비참함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디어로부터 최대한 숨겨두는 불평등과 가난의 처참한 현실은, 한 번뿐인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 죽는 사람들을 둘러싼 종이사다리의 벽은, 여하한 경제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도덕의 영역이고 인류의 실존적 고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로 치환되든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으로 포섭되든 마찬가지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비판 지점에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다. 왜 20달러짜리 옷은 생산지인 방글라데시에 1달러만이 돌아가고 19달러가 선진국 내…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시민의 권력에 토대를 둔 공화국을 발명할 수 있는가?

혁명은 시간의 경첩이다. 프랑스혁명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끊고, 시계열 자체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새로운 역법을 만든 것”. 시간은 탈구되었다. 순환(révolution)이었던 것은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는 역전(révolution)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실한 개연성 및 상호 관계―“모든 혁명은 독립 전쟁이다”― 속에서 나타나며, 완전히 우발적이지도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그 역사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혁명은 모든 가능성들의 합계 속에 세워진다”. 정치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여러 정치들 사이의 분열 및 불화를 내재화하려는 몸짓들 속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불화, 즉 상상과 현실의 첨예한 화학 작용은 모든 가능성들의 끄트머리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가장자리, 식민지―“혁명은 끝없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이 첨단을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누구도 보편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진정한 보편성은 가장 소외된 장소, 가장 예외적인 장소에서도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은 완전한 차이를 경유한 완전한 차별을 산출할 뿐이다―“인종적 불평등이 법적 불평등을 대체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총을 쥐고서 했던 말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을, 영원히 기다려질 보편성의 다소 불길한 전조를 이룬다―“보라, 이것이 우리의 자유다”.


여기서 자유와 총의 등치는 ‘혁명은 곧 폭력’이라는 진부한 공식처럼 보인다. 혁명은 종종 악마화되지만 그 자체로 폭력적인 혁명은 없다―“‘민주주의의 병리학’ … ‘공포정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혁명을 위한 폭력만이 있다. 혁명은 시민을 발명했고, 시민 권력을 토대 삼아 공화국을 발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화국의 법은 폭력을 최대한 주변화했다―“자유 국가에서 군부 권력은 가장 제약받아야 한다”. 폭력을 수반한 혁명의 억압은 폭력성의 현현이기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미스의 한 마디

포자드생퐁(Barthélemy Faujas de Saint-Fond)이라는 프랑스 광물학자(암석학자?)가 1797년에 2권짜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Voyage en Angleterre, en Ecosse et aux îles Hébrides, ayant pour objet les sciences, les arts, l'histoire naturelle et les moeurs)>를 출판했다.


책 표지에 "뉴캐슬, 더비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퍼스, 세인트앤드루스 등"의 암석과 광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광고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책이지만 온갖 과학에 대한 당시 독자층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는 부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포자드생퐁이 이 책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만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스미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그 저자[루소]가 당한 숱한 박해를 모두 갚고도 남을 것입니다."

밑거나 말거나다. 그랬단다.